매일신문

"옛날 옛적에…" 할머니 무릎팍 얘기 부활

유아 교육 현장에서
유아 교육 현장에서 '할머니 선생님'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29일 대구 동부도서관에서 진행된 '이야기꾼 할머니의 맛있는 동화 구연' 프로그램에 모인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권정희 할머니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할머니, 옛날 얘기 해주세요~'

밤의 밑바닥이 새하얗게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손자의 머리를 무릎에서 내려놓는다. 이야기를 조르던 아이는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아이는 구수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할머니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가졌나보다. 값비싼 동화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재미난 이야기가 할머니의 주머니 안에서 화수분처럼 끝없이 흘러나왔다.

할머니를 통한 어린이 감성 교육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조부모와 함께하는 대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가운데 조부-손자 세대를 이어주기 위한 정책들이 교육현장에 도입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이 수년전부터 도입한 '3세대 하모니 교육정책 과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사업'이 그것. 아이들은 할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고, 할머니들은 자원봉사를 통해 일하는 보람을 맛볼 수 있어 인기를 얻고 있다. 각 지자체나 교육청, 도서관 등에서 유아들과 함께 할 할머니 자원봉사자를 찾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동화 구연 할머니, 인기 만발

"한 꼬마가 자고 일어나니 배꼽이 없어졌어요. 놀란 꼬마는 배꼽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기 시작했어요. 여러분은 다들 배꼽이 있나요?" 분홍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권정희(65) 할머니가 동화 '배꼽이 없어졌어요'를 읽다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 앞에 둘러앉은 꼬마들은 자기의 옷을 들추고 배꼽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여기저기서 "배꼽 있어요"라는 답이 터져나왔다.

배꼽을 찾아 길을 나선 꼬마가 만나는 동물들의 흉내까지 내는 얘기를 실감나게 들려준 권 할머니. 배꼽이 있는 동물과 없는 동물의 차이를 알려줬다. "엄마 뱃속에서 직접 나온 동물은 배꼽이 있고 알에서 태어나는 동물은 배꼽이 없어요. 알겠지요?"

지난달 29일 오전 대구 동부도서관 1층 북스타트룸에서 열린 '이야기꾼 할머니의 맛있는 동화 구연' 프로그램.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권 할머니는 도서관에서 마련한 평생학습강좌 '할머니, 어머니 동화구연반'에 참여했던 할머니 20여 명과 뜻을 모아 3년 전 '동부 책고리할머니 봉사단'을 꾸렸다. 동화구연 자원봉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도 젊어졌다.

"책을 외우다시피 하고 소품도 직접 챙겨야 합니다.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지만 낯익은 아이들, 엄마들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할 때면 피곤함을 잊어버리죠. 제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만족감도 생기고요."

이날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일흔 살의 신정자 할머니. 직접 바느질 해 만든 토끼, 호랑이 손인형을 양손에 끼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옛날 옛날 깊은 산속에 토끼가 혼자 길을 걷고 있었어요. 여러분 산토끼 노래 한 번 불러 볼까요?" 다 함께 손뼉을 치며 산토끼 노래를 부른 뒤 신 할머니는 토끼를 잡아 먹으려는 호랑이를 등장시켰다. 그리고는 토끼가 돌멩이를 불에 달궈 인절미라고 속이는 꾀를 낸 덕분에 인절미와 토끼 모두 탐을 낸 호랑이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호랑이처럼 욕심을 많이 내면 안 되겠죠?" 신 할머니의 맛깔스런 이야기 솜씨에 아이들은 흠뻑 빠져들었고 앙증맞은 손인형을 보곤 귀엽다고 야단이었다.

신 할머니는 아이들을 만나면 활력이 생긴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눠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에요. 이미 손주들은 다 커버려 제 손이 필요치 않으니까요. 옛날 얘기를 듣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도 신이 납니다. 자주 보는 아이들은 이름도 외우고 있죠."

아이들도 이야기 할머니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다. 초등학교 1학년 딸과 도서관을 찾은 김미경(34) 씨는 "집에 가서도 아이가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흉내내며 놀 정도로 즐거워 한다"며 "엄마도 할머니처럼 읽어달라면서 동화책을 가져와 조르는 통에 난감할 때가 여러 번"이라고 웃었다. 7, 9살인 아들 둘과 함께 한 하민정(39) 씨는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이 좀 더 차분해지고 책을 가까이 하게 됐다"며 "할머니들이 하시는 걸 보고 엄마들도 배우는 기회가 되니 더욱 자주 찾게 된다"고 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달 26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열리며 별도의 참가 신청도 필요 없다. 도서관 열람봉사과 노경자 과장은 "할머니 선생님들이 워낙 열정적이신 데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와 부모도 할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고 좋아한다"며 "도서관뿐 아니라 지역 아동센터나 유치원도 찾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앞으로 이 프로그램을 더 확대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할머니의 힘, 유아 감성 교육 돕는다

교육 현장에서 '할머니 선생님'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동부도서관의 이야기 할머니들뿐 아니라 시교육청이 할머니들을 유치원 보조교사로 활용하는 '3세대 하모니교육 정책사업'도 매년 확대되고 있다. 또 '이야기 할머니 사업'이 3월부터 본격 시작될 예정이어서 '할머니 선생님'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3세대 하모니교육 정책사업은 중·고령 여성(만 50~60세)에게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유치원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마련한 제도. 하지만 단순히 일자리 제공이라는 목표를 넘어 아이들이 할머니의 정을 느끼며 정서적 안정을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2007년 1억7천여만원을 들여 66개 유치원에 인력을 지원했는데 2008년 114개(3억8천여만원), 2009년 186개(7억8천여만원), 2010년 234개(9억7천여만원) 등 매년 사업이 확대됐다. 올해는 10억8천여만원을 투입해 지역 321개 유치원 가운데 260곳에 1명씩 '할머니 선생님'이 찾고 있다. 할머니들은 어린이들의 생활습관 지도와 자료 제작 보조, 급·간식 준비, 책 읽어주기 등 하루 4시간 정도 유치원 업무를 보조한다.

또 시교육청은 3월부터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을 본격 시행한다. 한국국학진흥원 부설 한국인성교육연수원에서 60시간 연수를 마친 할머니들이 매주 한 차례 유치원에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이다. 일단 선발된 50여 명의 '할머니 선생님'이 104개 유치원에 들르고 사업 평가 후 확대 운영을 검토키로 했다.

시교육청 창의인성교육과 유아교육담당 최방미 장학관은 "대가족제 아래에서는 조부모가 가족의 중심을 잡고 자녀 교육에 모범을 보이는 등 역할이 컸으나 현재는 그 같은 문화가 사라져가는 상태"라며 "할머니들이 자애로움과 온화함을 앞세워 보듬어나가면 아이들이 정감을 느낄 뿐 아니라 동화 구연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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