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열기가 찬바람을 녹일 정도로 뜨겁다. 유난히 기승을 부린 올겨울 한파에도, 야구를 배우고 즐기려는 시민들이 운동장과 공터를 찾아 겨울 추위를 녹이고 있다. 직장인들로 구성된 사회인야구 동호회원들은 부족한 개인 기술과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기꺼이 찬바람을 맞고 있다. 생계가 달려 있는 전문 선수가 아닌 이들이 안방의 온기 대신 칼바람을 맞으며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은 너무나 야구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겨울 잊은 야구 열기
휴일이었던 13일 오전 대구 북구 침산동의 한 간이 야구장. 영하의 날씨였지만 이곳에선 '파이팅' 소리가 넘쳐났다. 3월에 열리는 정식리그를 앞두고 실력 향상을 위한 동계훈련이 펼쳐진 것. "춥다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몸을 더 움직여."
수비수에게 노크 볼을 쳐주는 김성수(41) 씨의 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허리를 더 낮추고 공에서 시선을 떼지 말라니깐." 김 씨의 호통에 공을 받던 이정호(35) 씨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추위에 손등은 벌겋게 얼었고, 코에선 맑은 콧물이 흘렀지만 더 이상 실수하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지난달 30일 리그 왕중왕전이 열린 날 서승교(36) 씨는 아침부터 짐 꾸러미를 차에 싣느라 분주했다. 각종 야구장비에다 가스버너, 대형냄비, 라면, 어묵 등을 차곡차곡 실었다. 어묵국물은 겨울 야구의 필수품. "야구는 서있는 시간이 많아 금방 몸이 얼어버립니다. 따뜻한 국물은 식어버린 몸을 풀어줄 긴급 식량인 셈이죠."
서 씨가 준비한 비상식량은 효과만점이었다. 이날 낮 최고기온이 영하권에 머문 데다 바람도 세차게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에 이르렀다. 다행히 몸을 데울 따뜻한 국물 덕분에 선수들은 힘을 내 홈런과 안타를 연방 터뜨리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추울 땐 공을 치면 온몸이 짜릿합니다. 2, 3시간씩 서 있다 보면 몸은 얼음덩어리가 돼버립니다. 하지만 몸이 근질근질해 집안에 웅크리고 있질 못합니다. 악조건을 이겨내는 것이 스포츠 정신 아닌가요."
모든 실외스포츠가 그렇듯 야구도 10월 중순을 넘기면 날이 풀리는 3월까지 겨울잠(?)을 잔다. 추위에 땅도 얼고 몸도 얼어 부상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말과 휴일에만 시간을 낼 수 있는 사회인 야구 동호인들에게 추위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김승주(38) 씨는 "집안행사나 출장 때문에 쉬는 날,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겨울마저 쉬면 야구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이들이 운동장으로 향하는 이유다.
◆"가족과 함께 야구해요"
전승열(34) 씨는 요즘 야구장에 갈 때 6세 아들을 꼭 데리고 간다. 아들에게 입힐 유니폼도 따로 한 벌 맞췄다. 아버지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아들은 마치 야구선수가 된 것처럼 좋아한다. 공을 주고받으며 부자지간의 정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이 덕분에 전 씨는 주말과 휴일, 가족을 내팽개치고 야구하러 간다는 아내의 잔소리에서 벗어났다. 전 씨는 "회원 상당수가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원망을 들으며 야구를 하고 있다"며 "처음엔 취미생활도 못하느냐며 아내와 다퉜지만 가족을 야구장에 데려온 뒤부터는 더는 불화가 없어졌다"고 했다.
전 씨는 요즘엔 야구장을 가족 피크닉 장소로 활용하는 회원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사회인야구가 활성화되면서 남편 혼자 즐기는 야구가 최근 가족화합의 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는 회원들은 주중에 모범 남편이 된다. 주말에 시합이 잡혔을 땐 퇴근길 들르는 술집도 끊고, 곧바로 집으로 가 설거지도 돕고 아이들과 놀아주며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
김호윤(37) 씨는 "야구가 하고 싶어 주중에 성실한 남편이 되니 오히려 아내가 더 반긴다"며 "기회가 되면 가족 앞에서 홈런을 날려 멋진 남편과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여전히 열악한 야구 환경
사회인야구 동호회가 최근 급격히 늘고 있지만 뛸 공간은 태부족이다.
사회인야구팀이 대구경북에만 1천여 개 될 정도로 많지만 대다수 팀이 야구할 공간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 야구장은 축구장과 달리 펜스, 그물, 널찍한 공간 등 보호시설이 필요해 부지를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건설비용도 만만치 않다.
낙동강, 금호강변의 공터나 야구부가 있는 학교 운동장을 활용하고 일부는 아파트개발 부지를 임대해 야구장으로 쓰고 있지만 부지난은 해가 갈수록 더하다. 더욱이 올해는 고교야구 주말리그 때문에 그동안 사용하던 학교 운동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게다가 강변 야구장은 물이 차면 사용 못하는 데다, 이 중 일부는 무허가 시설이다. 사회인야구 리그를 운영하는 관계자는 "현재 각 리그에서 사용하는 야구장 상당수는 국유지를 몰래 또는 임시로 이용하고 있으며 사유지 경우 비싼 임대료를 치르고 있다"며 "야구 열기에 맞춰 지자체는 야구 동호인들에게 안정된 공간을 확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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