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9>영천 보현산 하늘길

별 볼일 없는 사람도 별 볼일 많아지는, 여기가 '별천지'

양지마을은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양지마을은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웰빙숲길 속의 데크로드.
웰빙숲길 속의 데크로드.
구들장 채석장.
구들장 채석장.
별빛마을에 들어서면 멀리 보현산천문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별빛마을에 들어서면 멀리 보현산천문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현산은 별빛과 햇빛이 가장 많이 드는 산이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곳에 별빛마을이 있고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는 양지마을이 있다. 산이 높아 계곡도 깊다. 산이 높은 곳에 두메산골이 있고 계곡이 깊은 곳에는 선비들이 은거한 구곡원림이 남아있다. 별빛마을과 양지마을, 두메산골과 구곡원림은 모두 길로 연결돼 있다.

◆선비들의 은거지 횡계구곡

보현산 옛길은 영천에서 청송방향으로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 화북면소재지 오른쪽 화북정수장 옆에서 시작된다. 횡계들판 오른쪽 산기슭에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계곡과 만나는 지점에 횡계리 마을이 나온다. 옛길은 다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사잇길을 따라 정각리 별빛마을을 지나 천문대 가는 길과 임도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오솔길로 작은보현산을 넘어 포항시 죽장면 두마리 마을로 이어진다.

현재 영천시 화북면에서 노귀재로 가는 길과 화북면 옥계리에서 횡계리로 난 길은 신작로에 해당한다. 횡계들판 오른쪽의 산기슭길과 정각리 오솔길을 따라 작은보현산을 넘어 두마리로 이어지는 길은 매일신문 취재진이 이번에 새로 찾아낸 옛길이다.

보현산은 조선후기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보현산의 맑은 물이 흘러내려 큰 내가 가로로 흐른다는 횡계리에 주자의 무이구곡 같은 횡계구곡이 남아있다.

횡계구곡은 영남 사림으로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훈수 정만양(1664∼1730)과 지수 정규양(1667∼1732) 형제가 경영한 구곡원림으로 도로와 횡계저수지에 의해 일부 훼손됐지만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훈수와 지수는 횡계에 태고와, 옥간정 등 정자를 지은 뒤 구곡을 설정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주자의 도학적 삶을 실천했다.

벼슬을 하지 않은 훈수, 지수 형제는 횡계구곡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해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횡계구곡은 영천시 화북면 옥계리에서 보현산천문대 가는 신작로 오른쪽에 위치해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지나치기 쉽다.

횡계구곡 제1곡 쌍계는 옥계리에서 횡계리로 가는 들머리의 횡계교 아래로 노귀재 쪽에서 내려오는 옥계와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횡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쌍계에서 600m 정도 올라가면 제2곡 공암이 나온다. 공암은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가 본래의 경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횡계구곡 3곡인 태고와는 지수 정규양이 35세 되던 1701년에 건립됐으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해 모고헌이라 불렀다.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모두 마루를 두른 독특한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태고와 위쪽에 있는 4곡 옥간정은 훈수와 지수가 학문 연구 및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에 지은 정자로 앞쪽 계곡의 언덕과 바위에 '격진병' '광풍대' '지어대' '제월대' 등의 이름을 붙였다. 바위 사이를 막아 작은 연못을 만든 뒤 뗏목을 타고 거문고를 켜기도 했다.

횡계리 주민 윤영주(76) 씨는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의 교량 3개가 놓이기 전 옥간정 앞에 나무다리가 있었고 태고와 앞에는 돌다리가 있었다"며 "현재 제방위의 길은 경지정리 당시 시멘트로 포장됐다"고 말했다. 윤 씨는 "마을 사람들이 화북면 자천장에 갈 때 이용한 산기슭 쪽의 옛길은 작년에 완전하게 포장됐다"고 말했다.

옥간정 위로 제5곡 와룡암, 제6곡 벽만, 제7곡 신제, 제8곡 채약동, 제9곡 고암 등이 위치하고 있다. 신제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현재 횡계저수지의 제방이 있었던 자리로 당시에도 새로 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채약동은 횡계저수지 오른쪽 끝지점의 소나무 군락지의 마을로 수몰됐다. 고암은 채약동에서 자하봉 산길로 500여m 올라간 지점이며 고산사가 있었던 곳이다. 훈수, 지수가 고산사에서도 후진을 양성해 서당골로도 불린다.

◆서민들의 삶터 산촌마을

횡계구곡이 학문에 정진하며 인재를 양성한 선비들의 은거지라면 산촌마을은 보현산을 오르내리며 생계를 이어간 서민들의 삶터였다.

보현산 자락에는 정각2리의 양지마을, 음지마을, 정각1리의 별빛마을, 절골, 포항 죽장면의 두마리 등 산촌마을이 많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양지마을은 가파른 산 중턱에 위치해 보현산천문대 가는 길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지나치기 쉽다. 횡계리를 지나 왼쪽의 조그만 표지석을 따라 산길로 올라가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양지마을이 나온다. 동네 길이 가파르지만 돌담과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 숲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맑은 날이 가장 많다는 영천의 양지마을이라 우리나라에서 햇볕이 가장 많이 드는 마을인 셈이다. 마을 입구에 쓰러져 가는 당산목이 나지막한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주민 김태순(79) 씨는 "이 동네에서 7, 8년 전까지 동제를 지냈지만 사람들이 줄어 현재 15가구가 남아있다"며 "이전에 나물이나 약초를 캐 옛길을 따라 자천장에 많이 내다 팔았다"고 말했다.

전민욱 경북문화관광해설사는 "영천에는 예전부터 1자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천장이 컸으며 화북지역이 살기 좋았다"며 "양지마을에는 400여 년 전 능주 구씨들이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와 가장 먼저 정착한 것 같다"고 했다.

해발 400여m의 양지마을 오른쪽에는 음지마을이 있다. 이곳에서는 보현산 정상, 천문대, 별빛마을, 양지마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좋아 민박집이 3곳 있다. 주민 70여 명 중 25%가 80세 이상 노인이라고 한다. 공기가 맑아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이 마을의 주민 40가구 가운데 외지인이 4가구나 된다. 이장 박은구(69) 씨는 "대구에서 공직생활을 마치고 10여 년 전 이 마을로 귀촌했다"며 "휴양림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보현산을 오르거나 텃밭에서 일하는 기쁨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도시인들이 마을의 빈집 대부분을 이미 매입해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곳 산촌마을의 땅값이 화북면소재지의 땅값보다 더 비싸다"고 덧붙였다.

정각1리 별빛마을 주민들은 요즘 봄 향기를 가득 머금은 미나리 수확과 고로쇠나무 수액 채취에 한창이다. 별빛촌 미나리는 청정 암반수로 재배해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보현산천문과학관이나 보현산천문대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비닐하우스에서 미나리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다.

이 마을에서 오래된 절골에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기 양식의 정각리 3층 석탑이 있다. 절골 입구에는 아름드리 당산목이 있다. 주민들과 출향인 50여 명이 음력 8월 15일에 함께 모여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주민 양명규(62) 씨는 "도시에서 군무원 생활을 하다 6년 전 남원 양씨 집성촌인 절골에 들어와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며 "절골 3가구를 포함해 7가구가 도시에서 정각1리에 귀촌해 살고 있다"고 했다.

정각1리에는 보현산 너머 두마리 마을 사람도 이곳으로 시집와 살고 있다. 두마리 마을 사람들이 나물과 곡식을 지고 보현산을 넘어 자천장에 가서 정각리 사람들을 만나 중매로 결혼했다고 한다. 김중하 영천시 문화공보관광과장은 "영천에는 두마리로 시집 간 누나가 불쌍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마는 골짜기였다"고 말했다.

보현산에는 당시 두마리 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오솔길이 남아 있다. 오솔길은 절골 위쪽의 보현산천문대 가는 길과 임도로 갈라지는 지점의 오른쪽에서 시작되며 현재 웰빙숲길이 조성돼 있다. 절골에서 미나리를 재배하는 양덕술(66) 씨는 "이전에 자천장이 서는 날(4'9일) 두마리 마을 사람들이 이 오솔길을 주로 이용해 정각리를 거쳐 장을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웰빙숲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옛길 안내판이나 오솔길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명품 관광코스로 조성

영천시는 보현산 옛길을 중심으로 '하늘길'을 조성한 뒤 관광명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보현산천문과학관, 보현산천문대 등 별빛을 테마로 체험관광에, 새로운 탐방로를 마련해 명품 관광코스로 가꿔나갈 방침이다.

시가 계획 중인 보현산 하늘길은 구들장길, 천수누림길, 태양길, 보현산댐길, 횡계구곡길 등 5개 코스다. 우선 현재 웰빙숲길 오른쪽으로 난 임도의 중간지점에 있는 구들장 채석장을 탐방로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곳에선 20년 전까지 구들장을 캐낸 곳으로 정각리 주민들이 지게로 져다 날라 팔았다고 한다. 채석장 주변에는 구들장 조각으로 쌓은 작은 탑들이 있다.

현재 보현산천문대 앞 시루봉에 조성돼 있는 천수누림길에는 '관천대'를 설치해 포토존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 비경을 간직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을 주제로 한 태양길 및 별빛마을∼옥계리 간의 보현산댐길도 탐방로로 조성할 계획이다. 횡계구곡의 태고와, 옥간정 등도 문화유적 탐방코스로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이원조 영천시 관광진흥담당은 "별빛을 테마로 한 체험에 옛길을 살린 하늘길이 조성될 경우 보현산 일대가 명품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영천'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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