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장관과 사무관

공무원을 향한 불만 중에는 융통성이 없다는 게 있다. 규정에 얽매여 일을 처리할 뿐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알고 보면 융통성이 없도록 돼 있다. 규정에 벗어난 일을 처리하다가는 특혜 시비에 휘말리게 될 뿐이다. 비슷한 유형의 민원을 어떤 것은 들어주고 어떤 것은 불허하다가는 목을 지키기 어렵다. 새로운 정책을 선택할 융통성이 없는 것이다.

전직 어느 광역 단체장은 개발사업의 결재 서류에 시장 난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없애 버렸다. 규정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무원들에게 "모든 책임은 내가 다 진다"는 것을 알린 메시지였다. 그 이후 사업 추진 속도가 빨라졌고 그 도시는 급속도로 변해갔다. 규정에 얽매여야 하는 일선 공무원과 소신껏 일해야 하는 단체장의 다른 역할을 보여준 사례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크게 화를 냈다는 후문이 들린다. 감기약 소화제 등 일반의약품 슈퍼마켓 판매가 사실상 무산된 데 대한 질책이었다. 대통령은 지난해 "콧물이 나면 내가 아는 약을 사먹고 개운해진다. 미국 같은 데 가보면 슈퍼마켓에서 약을 사 먹는데 한국은 어떠냐"고 진 장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일반의약품의 슈퍼 판매를 지시한 말로 해석됐다.

그러나 진 장관은 "대통령이 모르는 사실을 물어본 것뿐"이라는 엉뚱한 해석을 했다. 나아가 약사회 모임에서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관가에서는 장관이 부정적인데 관료들이 움직일 리 없다며 슈퍼 판매는 물 건너갔다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는 대다수 국민이 찬성한다. 실제 소화제 등은 슈퍼에서 과자 사듯 약사와 소비자가 아무런 설명 없이 사고판다. 그러나 약국보다 5~6배 많은 슈퍼, 편의점은 휴일과 야간에도 문을 열지만 약국은 이 시간 거의 문을 닫는다.

장관은 정책에 대한 소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신은 국민 다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대통령은 "장관이 왜 사무관처럼 일을 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국민을 위한 정책은 외면한 채 기존 법규에 얽매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과연 장관으로서의 책무를 잘하고 있는 것일까.

서영관 논설주간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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