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24)대구읍성 성밖길(영남대로 대구 과거길)

"하루를 살더라도 양반·상놈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대구시 중구 남성로와 동아쇼핑 사이에 나 있는 골목길(매일신문사 옆 골목)이 옛 영남대로다. 과거에 응시하는 조선시대 경상도 선비들은 이 길을 따라 서울로 갔다. 최근 대구시 중구청이 이 골목길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대구시 중구 남성로와 동아쇼핑 사이에 나 있는 골목길(매일신문사 옆 골목)이 옛 영남대로다. 과거에 응시하는 조선시대 경상도 선비들은 이 길을 따라 서울로 갔다. 최근 대구시 중구청이 이 골목길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1. 주막에서 길을 찾다

철종 임금이 승하하고 고종 임금이 즉위하였으니 곧 증광시가 있을 것이라는 풍문을 듣고 밀양의 박 선비는 영남대로를 따라 과거길에 올랐다. 청도 팔조령을 넘어 달성 가창을 지나 어느덧 대구 성밖길에 이르렀다. 성밖길은 대구읍성 남문밖 앞밖길로 대구읍성을 따라 달성과 칠곡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과거에 관한 정보도 얻고 그동안 익힌 학문을 정리할 곳으로 경상감영이 있는 양반도시, 대구는 수험생이 잠시 머물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대구에서 당분간 여장을 풀 요량으로 성밖길을 따라 늘어선 주막을 기웃거리던 박 선비는 뜻하지 않은 물벼락을 맞게 되었다. 설거지를 하고난 뒷물을 덮어쓴 것이었다. 비록 음력 3월로 들어섰으나 아직도 북풍이 채 가시지 않아 웅크리고 다니던 터에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여봐라!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냐!"

박 선비가 목청을 있는 대로 높여 소리치자 주모가 황급히 뛰어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뒤이어 주모의 딸, 곱단이 뛰쳐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도령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천한 것들이라 배운 게 없어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주모가 머리를 땅에다 대고 용서를 빌자 곱단이도 어쩔 줄 모르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의 부주의도 한 원인이었으므로 주모의 잘못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계제가 아니어서 박 선비는 마지못해 얼굴을 풀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두루마기를 툴툴 털었다.

"제기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모양이네. 여기서 며칠 쉬어갈 모양이니 따뜻한 방으로 안내하고 술상이나 한상 보아오도록 해라."

주모는 주막 뒤채에 있는 조용한 방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방은 벽지도 바르지 않아 흙내가 물씬하고 벽이 울퉁불퉁 험하긴 했지만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다. 박 선비가 방에 들어 좌정하자 주모가 옷을 내어 오고 곱단이가 큰 용기에 물을 가득 담아 왔다.

"비록 천하고 남루한 옷이지만 갈아입고 계시면 길 떠나기 전까지 깨끗이 세탁하여 대령하겠습니다."

"간단히 세안이나 하십시오."

주모와 곱단이가 번갈아 가며 머리를 조아리며 시중을 들자 박 선비는 조금 전의 재수 없었던 상황이 전화위복이 된듯하여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는 과거 보러 가는 사람이네. 여기서 며칠 머물며 한양 소식도 들어보고 부족한 공부도 벌충할 작정이니 주모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박 선비가 정신을 수습하고 주모와 그 딸, 곱단이를 찬찬히 살펴보니 모녀가 여사 미모가 아니었다. 주모는 얼굴이 그을고 기미가 조금 있긴 했지만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뚜렷한데다 사슴 눈을 가진 서른 중반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고, 어미를 닮은 그 딸, 곱단이는 해말간 얼굴에 아직 사내를 겪지 않은 풋풋한 처녀인 듯했다. 과거길을 떠나는 선비에게 가장 큰 적은 여색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박 선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과거길인 영남대로를 따라 들어 선 수많은 주막에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주막집 여인간의 전설이 하나 둘이 아닌 것으로 봐서 여자를 조심하라는 선배들의 경고는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갈수록 과거길 정담이 더욱 더 늘어만 간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양이 서로 어울리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열심히 공부하고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하면 되는 것이지 여색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과유불급이고 또한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향이와 놀아났던 이몽룡이도 장원급제하지 않았던가. 정인이 있으면 목표가 더욱 확고해지고 마음이 더욱 절절하여 공부가 더욱 잘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모가 술상을 들고 박 선비의 방으로 들어왔다. 술상을 바닥에 내려놓은 주모는 방을 나가려는 듯 엉덩이를 들었다.

"주모, 외로운 나그네를 혼자 두고 가지 말고 여기 앉아 술시중이나 좀 들게나. 대구 사정도 좀 들어보세."

"도령님, 임자가 있는 몸이라 술시중 들기가 어렵습니다. 부디 혜량하여 주십시오."

"합방하자는 것도 아니고 술이나 좀 따르고 이야기나 좀 나누자는 것인데 그것도 안 되면 주막은 왜 하는가? 그 참! 괴이한 일이네."

"송구하옵니다. 제 서방이 너무 옹졸하여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여식이라도 들여보내게."

"딸년은 나이가 어려 아직 철이 없습니다."

"올해 몇 살인가?"

"열 여섯입니다."

"이팔청춘 아닌가! 그 나이에 춘향이도 이 도령 수청을 들었는데, 무얼 그리 아끼는가? 어릴 적 자식이지, 철들면 내놓아야 세상물정을 알게 되는 법이네. 언제까지 가둬둘 건가? 여식이라도 들여보내게."

"…정 그러시다면 차라리 이 몸이 술시중을 들겠습니다. 서방님 오기 전까지만 하겠습니다."

"참, 비싸게도 구는구먼!"

그렇게 어렵사리 술시중을 들게 된 주모는 최근의 흉흉한 민심을 전해주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하고 가렴주구가 심해지자 민생이 피폐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삼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는 판에 경주에서 최제우라는 신령한 도사가 잡혀 한양으로 압송 중에 임금님까지 승하하시니 말세가 올 거라는 이야기가 돈다고 했다. 동학 교주 최제우가 한양으로 잡혀가다가 중신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대구로 도로 환송되어 경상감영에 갇혀있고 곧 처형된다는 소문이 도는데 애꿎은 대구 사람들이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과거는 봐서 무얼 하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 임금님이 즉위하시고 밑바닥 민심을 잘 아는 대원위 대감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이제부터 모두 다 잘될 걸세. 면암 최익현 같은 어진 선비를 중용하고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기반으로 공맹의 왕도정치를 구현하여 척왜양이(斥倭洋夷)는 물론 사문난적(斯文亂賊)을 혁파하고 당파와 세도정치로 썩은 현 조정을 과감히 개혁한다면 격양고복하던 요순의 태평성대가 돌아올 것이니 주모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이고, 도령님. 학문이 높고 말씀이 너무 어려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우리 천한 백성도 배불리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 같아 귀가 즐겁습니다. 학문이 높은 선비를 잘 알아 모시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나중에 크게 되시면 부디 잘 봐 주십시오."

"과찬일세."

"아닙니다. 선비님은 반드시 장원급제하셔서 큰일을 하실 겁니다. 제가 천하고 무식한 것이긴 하지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대해 봐서 사람 볼 줄은 조금 압니다. 선비님은 틀림없이 크게 될 겁니다."

"하하, 고맙네."

"선비님, 나중에 크게 되면 이것도 인연인데 천한 것을 잊지 말고 우리 가족, 면천이나 해주신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하, 내가 주모에게 청탁을 받은 셈인가? 이젠 주모를 봐서라도 내가 꼭 출세해야 되겠구먼. 주모, 내 술 한 잔 받게."

"예, 영광입니다."

박 선비가 주는 술을 쭉 들이켠 주모는 안채를 향하여 딸을 불렀다. 딸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주모 자신은 의처증이 심한 옹졸한 서방 때문에 더 이상 술시중을 들 수 없으니 대신 딸을 불러 들여보내겠다고 양해를 구하고선 방을 나갔다.

#2. 사랑은 파도에 이는 거품인가

주모가 술시중 들기를 거부하는 곱단이를 안방에서 설득하고 있었다.

"이번 선비는 점잖고 크게 출세할 사람 같으니 네가 들어가서 술시중을 들어라. 네가 예쁘게 보여야 우리 가족이 면천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야. 선비 마음에 쏙 들어 본처로 들어앉는 날엔 팔자 피는 거고, 소실이라도 그런대로 괜찮은 팔자니, 지금 얼른 씻고 꾸며서 뒤채로 들어가 보거라."

"엄마, 싫어, 싫어. 난 벌써 덕팔이랑 약조를 했단 말이야."

계속 주모의 말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던 곱단이는 손톱을 깨물며 벌써 정을 둔 남정네가 있다고 말했다.

"너, 이 년, 벌써 덕팔이 놈이랑 합방을 했단 말이냐?"

"허엉…엄마!"

곱단이는 와락 주모 품에 안기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오냐, 괜찮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생선 피를 받아 두었으니 아무 걱정마라. 덕팔이 놈이랑 살아봤자 평생 천대받으며 짐승처럼 살다가 죄 없는 자식에게 천한 신분만 물려주게 되는 거다. 내 말 듣고 뒤채로 가거라. 이런 기회도 흔치 않단다."

"엄마! 덕팔이는 어떡해!"

"세월이 가면 잊게 되어 있단다. 나도 꼭 네 만할 때, 정인이 있었지만 과거 보러 가던 선비의 씨앗을 받았단다. 비록 버림을 받아 이 지경이 되었다만, 난 그래도 그때 일을 후회하지 않는단다. 그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다는 풍문을 들었지만 날 찾지 않는 걸 내가 어찌 하겠느냐. 네가 바로 그 선비의 여식이란다. 그래도 절반은 양반이니 나중에 박 선비에게 그 사실을 밝히면 조금 도움이 되겠지."

자신이 양반의 사생아라는 충격적인 사실에 곱단이는 주모의 품을 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순간, 곱단의 머리 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다리가 풀린 채 다시 풀썩 주저앉은 곱단은 주모의 무릎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주모는 슬픈 얼굴로 곱단의 머릿결을 어루만져주었다. 곱단은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세안을 하고 화장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뒤채로 들어갔다. 우두커니 앉아 문고리를 주시하던 주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침 없이 흘러내렸다. 대구읍성 위로 그믐달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3. 동학에 길을 묻다

자신과 혼인하여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자며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던 곱단이에게서 마른하늘에 벼락 맞듯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버림받은 덕팔은, 그것이 과거 보러 가던 선비 때문이라는 사실을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 차돌이에게서 전해 듣고, 하도 기가 막혀 몇날 며칠을 정신 줄을 놓고 지냈다. 죽으려고 목을 매었으나 줄이 풀려 실패했다. 그런 그에게 차돌이가 동학을 소개해주었다. 동학은 천민과 백정도 양반과 똑같이 평등하고, 남자와 여자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돌이의 말에 덕팔이는 귀가 번쩍 터였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 그 말은 나도 양반들 하고 똑같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말이지?"

덕팔이는 못 믿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나는 벌써 동학 모임에 여러 번 갔어.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래. 사람은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거야. 서학처럼 서양 신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은 똑같이 평등하다는 거야. 나도 자세한 교리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무튼 굉장한 거야. 이러한 동학사상을 우리나라 모든 백성에게 전파한다면 이 세상이 곧 극락과 같은 세상이 된다는 것 아니겠나.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동학을 믿고 있어. 이 동학은 지금 경상감영에 계신 수운 대신사께서 창시하신 건데,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고 초월하는 훌륭한 것이래. 올 초에 조정에 잡혀 박해받고 계시는데 그 때문에 멀쩡한 젊은 임금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야. 한양으로 압송하기 위해 과천까지 갔다가 해를 당할까 봐 겁먹고 경상감영으로 다시 환송했다는군. 조정에서도 수운 대신사를 잘못 건드려 진퇴양난인 모양이야. 하늘이 내신 분인데 그렇게 호락호락하겠어? 겁먹을 만도 하겠지. 그렇지만 대신사께선 선교를 위해 순교하시려고 마음을 굳힌 모양이야. 지금은 조정에서 방면하려고 해도 동학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면 순교하겠다고 하시나 봐. 삼월 열흘 미시쯤에 대구읍성 남문밖 아미산 아래 관덕당에서 대신사를 처형한다고 하더라. 그날 너도 나와 같이 그리 가서 그 장엄한 역사적 현장을 한 번 지켜보자. 그리고 대신사의 도를 널리 전해보지 않을래. 이 한 많은 세상을 동학을 통해 한 번 바꿔보잔 말이다."

차돌이는 입에 거품을 물고 덕팔이에게 설교했다.

"와! 차돌아, 너 이렇게 유식한 줄 몰랐다. 네가 존경스럽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나도 가야지. 죽어도 갈 거야. 그래서 그 분이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볼 거야. 그리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 사상을 전파할 거야. 하루를 살아도 양반, 상놈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상놈이라는 이유로 정인을 빼앗기는 이런 더러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참여할 생각이야."

이렇게 말하는 덕팔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거렸다.

오철환(소설가'대구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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