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직장암 환자 남현철씨

"내 암세포 이기고 둘째 딸 장애도 치료해야죠"

20년간 섬유 공장에서 일했던 남현철(가명
20년간 섬유 공장에서 일했던 남현철(가명'48) 씨는 2년 전 직장암을 얻었다. 삼 남매를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다가 몸이 고장 난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힘에 부치는 남 씨의 건강 상태 때문에 이날 인터뷰는 바닥에 누운 채 진행됐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밤이 돼도 공장은 쉬지 않았다. 20년간 섬유 공장에서 일했던 남현철(가명'48) 씨는 낮 근무보다 야간 근무를 선호했다. 매일 13시간씩, 낮에 일하면 5만원이지만 밤에 일하면 일당 7만원을 받았다. 공장에서 섬유 염색 일을 맡아 했던 그는 지독한 약품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혹사하며 일해야 했던 것은 삼 남매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2009년 직장암 진단을 받은 뒤 공장에 나갈 수 없게 됐다.

◆더 무거워진 가난의 무게

28일 오전 찾은 남 씨의 집 안방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누렇게 변해 버린 벽지보다 아무렇게나 그려져 있는 크레파스 자국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온 벽지를 장식한 낙서는 막내아들 민준(가명'3)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자국이다. 민준이는 남 씨가 나이 마흔을 넘겨 얻은 늦둥이다. 아픈 아버지는 세 살배기 아이를 말릴 힘도 없다. "낙서하지 말라고 민준이를 말려도 애가 저보다 힘이 더 세요. 민준이 쫓아갈 힘도 없어요." 이날 대화는 남 씨의 건강 상태 때문에 바닥에 누운 채 진행됐다.

그는 서구 비산염색공단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한 공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 철새 같은 노동자였다. 한 달에 절반은 낮에 일했고, 나머지 날에는 밤 근무를 섰다. 야간 수당 2만원을 더 벌기 위해서였다. 공장이 멈추는 일요일이 되어서야 그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빠듯했지만 한 달 150만원은 '견딜 만한 가난'이었다. 전업주부인 아내 성숙정(가명'40) 씨가 집에서 민영(가명'16)이와 민정(가명'8)이, 민준이를 보살폈고, 큰 욕심 없이 살면 남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 건강검진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피곤하다고 느낄 여유도 없이 일하다가 몸이 고장 난 것이다. 2009년 7월 남 씨는 대학병원을 찾았고 그때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암 진단을 받고 나서 한 달 뒤 항문 수술을 받았다. 남 씨는 "죽을 수 있다는 생각보다 돈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매달 월세 22만원을 어떻게 내야 할지, 공장을 그만두면 다섯 식구가 길에 나앉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픈 손가락, 둘째딸

둘째딸 민정이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팔이 불편했다. "우리 민정이는 혼자서 옷도 잘 못 입어요. 아침마다 내가 옷을 입혀줘야 해요." 둘째딸 이야기가 나오자 남 씨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민정이는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가 됐다. 오른손으로 연필을 잡을 수 없으니 왼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는다. 민정이는 오른팔 장애 때문에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남 씨에게 둘째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항상 씩씩하던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남 씨는 딸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린 거죠. 오른팔을 못 움직이니까."

남 씨는 일주일에 두 번씩 민정이를 데리고 재활병원에 간다. 집에서 병원까지 버스로 30분 넘게 걸리는 거리다.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아이의 오른팔 근육이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남 씨는 자신의 몸보다 딸 아이의 장애를 먼저 걱정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민정이가 재활 치료 받으러 못 가잖아요." 지금은 암세포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딸에게만큼은 듬직하고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얼마 전 남 씨의 딱한 사정을 안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한 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내일이 올까요"

남 씨는 큰딸 민영이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데도 민영이는 아픈 아빠 대신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민영이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업고에 진학했다. 한 학기에 수백만원씩 하는 대학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 씨의 부인 성 씨는 동네에 있는 작은 커튼 공장에 다닌다. 전업주부였던 성 씨는 아픈 남편 대신 가장이 됐다. 2년간 병원비로 1천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서 탈락할까봐 4대보험 적용이 안 되는 직장을 찾아 매달 70여만원씩 월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이 돈으로 막내아들 어린이집 보육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 월세 22만원을 근근이 감당한다. 생계급여 23만원을 받아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남 씨는 "막내 민준이가 아빠가 아픈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 민준이는 "아빠 어디 아파?" 하고 물어본다. 그러면 남 씨는 대답 대신 웃음만 짓는다. 무슨 병인지, 아버지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마음속으로 할 뿐이다. 남들 도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보려고 했던 남 씨는 암에 걸린 뒤 감당할 수 없는 가난의 늪에 빠져 세상 사람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