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30>영주 고치령 길

폐위된 단종과 금성대군 밀사들이 오갔던 恨맺힌 고갯길

고치령을 오르는 길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고치령을 오르는 길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고치령 정상 금성대군과 단종을 모신 산령각.
샘물
고치령 정상 금성대군과 단종을 모신 산령각.
샘물

하늘이 점지해 준 명당이 존재한다는 양백(태백산과 소백산)지간(兩白之間) 고갯길. 소백산맥을 넘는 3개 고갯길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한 고갯길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 물자와 사람이 분주히 오가던 길이지만 지금은 잊혀진 고갯길이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밀사들이 오갔던 비운의 통로이기도 하다. 죽령이 알리고 싶은 길이라면 고치령(760m)은 숨기고 싶은 길이다.

고치령은 비운의 역사와 옛 보부상들의 애환, 선조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남의 고도(古道)이다.

충북 단양군 의풍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리,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를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고치령

단산면 좌석리 세거리(좌석분교터)에서 시작되는 고치령은 마락리를 지나 충북 단양군 의풍리까지 총 22㎞ 구간이다.

상좌석에서 고치령까지는 도보로 2시간, 재 넘어 마을인 마락리까지는 3시간은 족히 걸린다.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친구 삼아 좁은 콘크리트 포장 길을 걷다보면 고요와 적막함이 밀려와 음산하기까지 하다. 인기척은 찾아볼 수 없다. 하늘을 가린 원시림 사이로 쏟아져 내린 햇살만이 길손을 반긴다.

숲 사이로 보이는 무너진 돌담과 이깔나무로 조림된 평평한 집터는 좌석리 고갯길 언저리에 무려 100여 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깔나무와 소나무 숲길 사이로 펼쳐진 계곡수와 길손들이 몸을 피했다는 피바위, 망을 보았다는 망바위, 물보라가 연꽃을 닮았다는 연화폭포를 보고 걷노라면 지친 피로도 말끔히 씻을 수 있다.

계곡 물소리가 잦아들고 이깔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 오르면 껑충한 장승들이 반겨주는 널찍한 광장이 펼쳐진다. 해발 760m 고치령 정상이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혼을 모신 서낭당(산령각)도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남부지방산림청 영주국유림사무소가 설치한 백호 모양의 수마석 표지석도 서 있다.

이곳은 왼쪽으론 국망봉, 오른쪽은 마구령 박달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길목이다.

강원, 충청, 영남 등 기호지방을 드나드는 고갯길은 죽령과 고치령, 마구령이 있다. 하지만 서낭당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 서낭당은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고갯길을 두고 앞뒤로 흐르는 계곡수는 피로에 지친 길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활력소다. 정상을 깔딱 넘어 100m쯤 가면 무색, 무미, 무취의 샘물을 만날 수 있다. 천연의 물맛이다. 여기서 길손들은 목을 축일 수 있다. 한 시간쯤 내려가면 전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마락리다. 신라와 고려 때 군마를 키우던 장소다. 그래서 말쏘, 죽통골, 멍에골 같은 관련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고치령(古峙嶺'770m)은 동국여지승람 영천군 산천조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 따르면 '관적령'(串赤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고치령의 소리 옮김 표기로 같은 이름이다. 串의 음 '곶'과 赤의 일음(一音) '치'로 소리 옮김한 곶치령이 고치령으로 바뀐 것이다.

이 길은 경북의 행정,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던 순흥도호부(현 영주시 순흥면 소재)를 연결하고 낙동강과 남한강 수운을 연결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단종애사와 관련이 있다.

◆금성대군과 단종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사육신들과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돼 유배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로 옮겨 오면서 고치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소백산 너머 영월군 청령포로 안치되면서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과 영남 선비들을 모아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밀사들을 파견, 청룡포까지 소식을 전했던 것. 또 금성대군 역시 조카인 단종이 보고 싶을 땐 야밤을 틈타 영월 청룡포를 다녀왔다고 전해지고 있어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밀사들이 오갔던 비밀 통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단순히 보부상들이 물류를 수송하기 위해 넘던 고갯길이 아니다.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 많은 고갯길이다.

단종 복위를 위해 이 고개를 넘나들던 수많은 밀사들의 수고와 노고는 한 노비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갔고 금성대군과 단종은 죽임을 당했다. 흥주도호부(현재 영주시 순흥면) 역시 몰락했다. 바로 정축지변이다.

당시 흥주도호부는 30리 안에 사람을 볼 수 없었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竹溪)천을 따라 십여 리를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현재도 피의 흔적이 끝난 마을을 '피끝 마을'(영주시 안정면 동촌리)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 상항이 처참했음을 짐작케 한다.

정축지변 이후 200년이 지나 숙종조에 순흥도호부는 환복됐고, 이후 매년 봄, 가을(음력 2월, 8월) 향사가 열리는 금성대군 신단, 조선 유학의 중심이자 민족교육의 산실인 백운동 서원(소수서원) 등이 들어서 다시 과거의 영화를 회복했다.

훗날 영주 사람들은 살아서 못 만난 조카와 삼촌을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 남쪽 순흥땅으로 유배됐다가 안동땅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으로 받들어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산신각을 지어 금성대군과 단종의 영혼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래서 고치령 서낭당은 재 아랫마을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고갯길이 아닌 정의로운 세상의 염원을 실현시켜 줄 통로로 기억되고 있다. 사람들은 매년 정월 열 나흗날이면 서낭당 산신제도 지낸다.

금창헌 소수박물관장은 "당시 부석, 순흥, 풍기, 영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산신당을 찾아와 치성을 드렸고 현재도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서낭당은 자물쇠가 채워지는 날이 없다. 6'25때 화재로 피해를 입었을 당시 이곳 사람들은 군수와 서장의 도움을 받아 서낭당을 다시 지을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늘아래 첫 동네 마락리

고치령을 넘어 맨 먼저 만나는 마을이 마락리다. 마락리는 지금도 고치령 서낭당에 제를 올리는 마을로 한동안 호랑이 출현으로 시끌법적했던 곳이다.

첩첩산중이라 사람이 산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락리란 이름은 고치령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들이 험한 고갯길에서 발을 헛디뎌 자주 떨어졌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마락리는 1960, 70년대 시골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천천히 걸어서 20, 30분이면 마을을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시골 마을이라 정겹다.

마락리에서 가장 큰 건물은 폐교된 마락분교이다. 교문 옆 교적비에는 1964년 개교해 1991년 폐교할 때까지 모두 147명의 학생을 배출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아이들이 떠난 학교는 이제 청소년수련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락분교 옆에 자그마한 가게도 하나 있다. 가게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민망할 정도지만 그래도 마을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고마운 존재다.

고치재 산령각 조성이란 자료에 따르면 1940년대 마락리에는 마구와 숙박시설이 있어 마부나 선질꾼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마락리에서 충청북도 도 경계는 15분 걸린다. 선질꾼과 촌로들이 법석거렸을 마락리. 이제 마을은 고요하다. 가구수라야 열다섯 정도다. 아이들은 없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계곡 건너편의 마을 명물인 '마주바위'가 금성대군과 단종을 아직도 기억하게 하고 있다.

흙 벽이 터진 집안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였다. 큰터, 새목 같은 윗마을이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다. 최근 귀농인 2가구가 들어와 블루베리와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이 마을 사람들이 정월 초하루와 10월 초정일 새벽 서낭당에서 당제를 지내는 것이다.

임원규(50) 이장은 "학교 다닐 적에 고치령을 수없이 넘어 다녔다"면서 "지리상 불편하지만 그래도 충청도 땅이길 바란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단양 쪽은 포장이 됐지만 고치령은 길이 좁아 불편하다"면서 "하지만 청소년 야영장을 찾는 사람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어 옛 고치령의 영화를 되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주'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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