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재박의 작명탐구] 마라토너 손기정

조국의 이름으로 뛰지 못한 슬픈 마라토너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세계인들의 눈과 귀가 한국을 향해 쏠리는 9일 동안, 최선을 다해 뛰어 줄 우리 선수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큰 응원이 필요할 것이다. 부담은 크겠지만, 자신의 조국을 대표하여 출전한다는 것은 선수에게는 큰 영광이자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단 한 명, 올림픽 육상경기 국가대표로 뛰었으면서, 그것도 우승까지 했으면서도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었던 비운의 선수가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의 올림픽 육상경기장은 각국 마라토너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이날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는 유력한 우승후보선수가 아닌, 작고 마른 체형에 다부진 얼굴을 한 동양인 청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청년의 얼굴에서는 기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은메달을 목에 건 영국인 선수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지만, 정작 월계관을 쓰고 금메달을 목에 건 청년의 표정은 노메달 선수의 모습보다 더욱 슬퍼 보였다.

메달 수여식이 끝난 후 경기장 안에는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의 국가(國歌)인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청년은 더욱 슬픈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조국을 일제의 손아귀에 빼앗겨 한국이 아닌 일본 국적으로 출전해야만 했던, 청년 손기정의 슬픈 시상식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한국인이기에, 그의 우승 소식은 한국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었다.

손기정(孫基禎)은 1912년 8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했던 시절,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철 따라 여름에는 참외장사, 겨울에는 군밤장사 등을 하면서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를 해야 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중국 단둥(丹東)의 한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이때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둥까지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을 하였다. 가난해서 달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그때의 환경이 마라토너가 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육상계에 큰 획을 그은 이름 '손기정', 그의 이름은 사주(四柱)상에 편인(偏印)과 상관(傷官)으로 작용하며, 그 성격이 영적인 세계가 풍부하여 사상가, 종교인, 스포츠, 연예계, 예술인 등이 많다. 또한 감각적인 재주도 뛰어나 컴퓨터프로그래머, 설계, 수리 등 정밀성과 완벽함을 요구하는 계통의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성격을 가진 이름이라도, 성장환경과 수양 정도에 따라 그 직업이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편인과 상관이 작용하는 이름이라도 학습이나 자기개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면, 편협(偏狹)한 성격으로 바뀌어 삶이 평탄치 못한 경우도 있다.

국적뿐만 아니라 이름마저 빼앗겨 기테이-손(Kitei Son)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 비운의 마라토너 손기정. 그러나 그는 한국 이름으로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국지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 때에도 그는 한국인임을 밝혔고, 일장기가 올라오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며 월계수 잎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땄을 때 "오늘은 내가 국적을 찾은 날이야" 라고 외쳤던 손기정, 지금은 천상에 계시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육상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응원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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