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의 르완다 등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사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한 우리나라도 엄밀히 말하면 전쟁을 쉬고 있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무슨 문화를 논하겠는가마는 수많은 총탄과 포화로 폐허가 된 그들의 참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지난해 일산의 한 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집단으로 납치돼 몇몇은 목숨까지 잃은, 우리에게 공포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금역(禁域)을 지난 2003년 봄에 찾아갔다. 탈레반 정권이 권좌에서 물러나 지금의 근거지인 북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평화의 기운이 움트던 그 즈음이었지만 불안감은 컸다.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의 땅이란 뜻이다. 아프간은 이 나라에 많이 살고 있는 파슈툰 종족의 이름이다. 서남아시아에 속한 나라로 서쪽의 이란, 동쪽의 파키스탄 그리고 위쪽의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 등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 200만의 도시 수도 카불은 한때 아름다운 도시였으나 지금은 폭격으로 황폐화되고 지뢰가 집 근처에 묻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1.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경계선인 아무다리야 강. 철조망과 전기철선이 둘러쳐진 길이 2㎞의 다리가 국경이다. 다리 아래는 시쳇말로 저승길이다. 강줄기를 가운데 두고 새까만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검정인지 코발트색인지 모를 강물 위에 나룻배 하나만 띄우면 영락없는 저승 행차다. 육신은 이승인데 서사(敍事)는 저승이니, 전도(前導)가 순탄치 않음이 분명하다. 그때 멀리서 어른거리는 점 하나. 움직임이 기민하다. 후다닥, 뭔가 다가온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눈을 돌리는 순간 소총의 총구가 코앞이다. 경계병이었다.
관광객이라고 설명하자 이내 얼굴이 풀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동공에 초점이 없다. 군인이라기엔 너무 늙었다. 냄새 또한 적잖이 수상쩍다. 코를 벌름거리자 그제야 가이드가 말문을 열었다. 아편에 취했단다.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 아편에 찌든 탓에 갓 마흔임에도 예순의 주름이 얼굴에 깊게 팼다.
다리 밑이 시커먼 것도 강 주변 갈대밭을 온통 태웠기 때문이란다. 아프가니스탄은 아편의 주재료인 양귀비 산출국이다. 양귀비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이를 노리고 밀매상들이 국경을 넘는 게 다반사다. 이들을 포착하기 쉽도록 어른 키 만한 갈대를 모두 새까맣게 태운 것이다.
#2. 수도 카불에서 좀 떨어진 하자르족 마을. 하자르족은 칭기스칸의 후예들이다. 탈레반은 수백 년 전 자신들의 선조를 몰살시킨 칭기스칸에 대한 앙갚음으로 정권을 잡자 이 지역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주택의 대부분이 폭격을 받아 절반은 허물어지고 남은 절반도 벽이나 창문이 없이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예 씨를 말릴 작정으로 주택가 인근에 지뢰까지 매설해 놨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절망의 끝에서 하자르족은 다시 희망을 품었다. 높은 산언저리까지 당나귀로 돌을 실어 나르며 새 보금자리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희망을 찍는 데 몰두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고함이 들렸다. 연이어 소총의 노리쇠를 후퇴-전진시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여차하면 쏜다는 경고였다. 뭔가 잘못됐다. 발을 들려는 순간 다시 고함이 들렸다. '꼼짝 마.' 군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능숙한 솜씨였다. 마침내 지뢰를 제거했다.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하루에도 20여 명이 지뢰사고로 목숨을 잃는다고 했다.
#3. 카불 시내에서 단연 눈길을 끈 곳은 자동차 수리공장. 온통 총탄 자국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폐차 직전의 차량들을 이리 펴고 저리 두드리니 제법 그럴듯하게 고쳐졌다. 그런데 반나절 동안 사용한 공구는 딱 하나, 망치뿐이었다. 20대의 정비공은 자신을 카불공대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전장(戰場)의 대학은 어떨까. '카불의 맥가이버(?)'라 할 만한 정비공 청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이튿날 카불공대를 찾았다. 이른바 아프가니스탄 최고의 대학이다. 하지만 대학이라기엔 너무나 황폐했다. 무엇보다 컴퓨터 한 대 없다는 설명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현지에서 바로 강남주 당시 부경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중고 컴퓨터를 지원키로 약속받았다.
여행을 마친 뒤 이들과는 후일담이 생겼다. 그해 6월 정비공 청년과 카불공대 학장을 부산으로 초대했다. 기증 컴퓨터도 가져갈 겸 들른 것이다. 그런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다고 했다. 아예 '밥'을 처음 본다고 했다. 30년 전쟁통에 오직 옥수수 전분으로 부친 빵만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햄버거로 허기를 달랬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위용이랄까. 햄버거는 먹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아시아의 주식(主食)보다는 미국산 햄버거가 더욱 친숙해져 있었다.
글·사진 도용복 대구예술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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