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처진 어깨 '베이비부머' 세대, 벼랑 끝에 내몰리나

한국사회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했던 베이비부머의 퇴장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자녀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노부모도 모셔야 하는 소위
한국사회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했던 베이비부머의 퇴장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자녀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노부모도 모셔야 하는 소위 '낀세대'이다 보니 정작 자신의 노후 준비는 해둔 것이 없어 걱정만 앞선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과 함께 살아온 세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들이 하나 둘 경제활동에서 물러나는 시기가 도래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뛰어온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는 약 712만 명. 전체 인구의 15%에 달하는 거대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일자리에서 물러나고 있고, 앞으로 5~10년 사이 본격적인 '집단 퇴장'이 이어질 전망. 하지만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은퇴 후에도 40년 이상을 살아야 하다보니 걱정이 앞선다. 자녀를 키우느라 허리가 휘도록 일했고, 노부모도 모셔야 하는 소위 '낀세대'인 이들은 정작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는 부족한 경우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영욕과 함께한 그들

베이비부머는 한국전쟁 후인 1955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도입되기 직전인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산업화 초기에 유년기를 보냈고,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2, 3부제 수업에 시달려야 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들이 대다수였고 대학 진학이 쉽지 않은 시대였지만, 교육열은 불타 농촌경제의 기둥뿌리인 소를 판 돈으로 대학 간다는 뜻에서'우골탑'이라는 말도 생기게 했다. 대학에 가서는 유신과 휴교령에 맞선 세대이기도 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최전방에서 피땀을 흘리며 오늘날의 발전을 일군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서울,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마산 등 대도시에서 산업일꾼으로 구슬땀을 흘렸고, 1987년 6'10 항쟁 때는 넥타이 부대로 나서 한국사회의 정치(절차적)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했다.

이제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나 싶을 즈음, 1997년 발생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삶의 기반이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시련을 맛봐야 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친숙해진 것이 바로 그때부터다. 그리고 그 뒤 '세계화'라는 큰 물결 앞에 휘청이는 한국경제와 함께 힘겹게 살아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두 번째 시련을 맞아야 했다. 당시 베이비부머들은 중견 간부급으로 가장 많은 눈총을 받았고 그중 상당수는 '사오정'(40대 혹은 50대에 정년퇴직)'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라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직장을 떠나 통닭집이나 호프집 등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삶이 녹록하지 않다. 그리고 근근이 버티며 직장에 남아있던 이들마저도 이제는 퇴직이 코앞에 다가오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

◆낀 세대, 어깨가 무겁다

베이비부머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은 '낀 세대'다. 산업 역군으로 자신의 부모님 봉양과 동생들 뒷바라지, 자식 양육까지 책임져야 하다 보니 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그들 역시 자식에게 기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빠르게 변해서 이제 아이들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일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자기 자신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세상, 그렇다 보니 과거와 달리 부모 봉양에 대한 생각은 희미해졌고, 대신 손 내미는 것만 익숙해져 퇴직금마저도 눈독 들이기 일쑤다.

올해 말 명예퇴직을 계획하고 있는 김모(54) 씨는 "더 이상 회사에서 버티질 못해 명퇴를 결심했는데 앞으로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6년 동안 살아갈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국민연금이라고 해봤자 110만원 정도지만 당장 수입이 뚝 끊어질 입장에서 고정수입 한 푼이 아쉬운 실정인 것이다. 김 씨는 "이제 모아놓은 돈을 까먹고 살 일만 남았는데 당분간은 퇴직금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평생 고생해 마련해 놓은 아파트 한 채만은 아내가 워낙 애착이 많다보니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하다"고 했다.

부모의 노후를 돌봐주지 않는 자식에 대한 서운함도 생기지만 그렇다고 자녀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모(55) 씨는 "애들 대학 다닐 때는 과외 아르바이트 하겠다는 걸 '아빠가 그 정도 뒷바라지도 못할 거 같냐'고 큰소리치며 자존심을 세우며 곱게 키웠는데, 이제 다 커 취직한 자식들은 아직 3년이 넘도록 용돈 한 번 주는 적이 없다"며 "자식들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 결혼해 기반을 잡고 살테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경제력 무너지면 삶도 함께 무너져

아직은 55세 전후의 나이. 살 날이 많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기운도 넘치지만 세상은 이들을 자꾸만 밀어낸다. 벌써부터 베이비부머들은 경제적 어려움, 은퇴 공포, 노후 불안, 소속감 상실 등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베이비부머들도 많다. 그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대변해주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베이비부머의 주력 계층인 50~54세 남성의 2009년 기준 10만 명당 자살률은 62.4명으로 20년 전인 1989년의 15.6명과 비교해 무려 300%(4배)나 급증했다. 같은 연령대 여성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도 5.2명에서 19.9명으로 증가율이 283%에 달했다.

이혼율도 증가 추세다. 50~54세 남성 이혼자는 2006년 1만1천792명에서 지난해 1만5천813명으로 34.8%, 여성은 7천628명에서 1만1천689명으로 53.2% 각각 늘었다. 이혼율로 따지면 남자는 0.76%에서 0.83%로 증가했고, 여자는 0.50%에서 0.59%로 높아진 것이다. 전체 인구의 이혼율이 남녀 모두 낮아지고 있는 추세인 점을 감안한다면 베이비부머들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위기의 원인으로는 '경제적 문제'가 첫손에 꼽혔다. 지난해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살 충동 이유로 남성의 절반(44.9%)가량이 경제적 어려움을 들었다. 이혼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해서 지난해 이혼한 50~54세 남성들은 이혼 사유로 경제문제(14.3%)를 성격차이(42.2%) 다음으로 꼽았다.

◆노후준비 '글쎄요'

평생을 앞만 보고 달렸지만 정작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은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3월 국민연금연구원, 보험연구원 등과 함께 조사한 '베이비붐 세대 실태조사 및 정책 현황 분석'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베이비부버의 31.4%가 노후생활 안정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된 것. 베이비부버들은 노후에 필요한 수입을 월평균 200만원 내외로 예상했지만 정작 확보 가능한 수입액에 있어서는 100만원 미만이라고 답해 극빈층으로 전락할 우려가 높은 이들이 26.1%에 달했고, 100만~200만원이 44.2%였다. 노후의 마지막 안전장치로 분류되는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비욜도 13.7%나 됐다.

하지만 창업이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해 퇴직 한 뒤 카페를 창업했던 권모(50) 씨는 "자영업을 하면 퇴직 연령이 없어 나이 먹어서까지 수입이 유지될 것이라 판단하고 일찌감치 준비를 서둘렀지만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강세이다보니 돈벌이가 쉽지 않다"며 "퇴직금으로 1년만 버티면 자리를 잡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나와 아내의 인건비도 제대로 건지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베이비부머의 은퇴는 향후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도 다양한 연구를 통해 정책 방향 개발을 모색하고 있지만 현실적 장벽에 부딪혀 실행이 쉽지 않다. 김주환 대구시 저출산고령사회과장은 "전국적으로 베이비부머가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데 비해 대구는 17.2%로 그 비중이 특히 더 높은 상황이라 이들의 집단 은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하지만 현실이 여의치 않다"며 "당장 노인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과 건강관리에 드는 비용만 하더라도 대구시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벅차다 보니 사실상 베이비부머 세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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