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2)후손으로 이어진 끝없는 고난

일제에 쓰러진 추산의 구군 정신, 핏빛 만주땅 항일투쟁으로 불타올라

항일 독립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손자 대용 씨가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란 신흥무관학교 옛터 중국 길림성 통화시 광화진 합니하 강변 언덕을 찾아 추산 선생의 영정 앞에 태극기를 두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항일 독립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손자 대용 씨가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란 신흥무관학교 옛터 중국 길림성 통화시 광화진 합니하 강변 언덕을 찾아 추산 선생의 영정 앞에 태극기를 두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올여름도 만주 길림성 통화시 광화진 합니하 강변 신흥무관학교 옛터는 추산 권기일 선생이 순국한 1920년 당시처럼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은 추산 선생의 손자 대용 씨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만주 항일유적지탐방 단원들이 당시 추산 선생과 독립지사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빗속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올여름도 만주 길림성 통화시 광화진 합니하 강변 신흥무관학교 옛터는 추산 권기일 선생이 순국한 1920년 당시처럼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은 추산 선생의 손자 대용 씨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만주 항일유적지탐방 단원들이 당시 추산 선생과 독립지사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며 빗속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독립군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으로 기록된 추산 권기일 선생이 순국한 날짜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다음해인 1920년 음력 7월 2일입니다. 이는 그해 양력으로 치면 8월 15일인데, 이날 이후 꼭 25년 뒤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습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추산 선생의 순국 일자가 8'15 광복절과 겹쳐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묘하다고 말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렇게 됐을까. 만주 항일지사 백하 김대락(안동 임하)은 나라를 잃자, '우습고도 분통하다 무국지민(無國之民) 되단말가. 칼도 창도 못 써보고 이 지경이 되단말가'라며 '분통가'를 지어 울분을 터뜨렸다.

누가 독립군 입대영장이라도 보냈는가. 나라의 공식적인 부름도 없었지만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전 재산을 털어 구국의 길을 나선 25세의 젊은 청년 추산. 100년 전 도만 항일투쟁의 행렬은 당시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도덕적 의무) 바로 그것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만주벌판의 추위도, 악랄한 일제의 총칼도 그들의 도도한 행렬을 막지 못했다.

◆추산의 순국은 '경신참변'의 서막

추산의 순국은 도만 8년 만인 1920년 6월 연해주 주둔 일본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그 보복으로 비무장 민간인 동포사회를 마구 공격한, 일제가 저지른 간도 '경신참변'의 서막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기화로 서간도 지역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이 중심이 돼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자 이에 자극받은 일제는 그해 여름 중국 관헌을 매수해 중일합동수색대를 편성한다. 이른바 기마토벌대로 불리는 중일수색대는 통화시 유가현 삼원포 마을을 습격, 소년부터 노인에 이르는 남자 300여 명을 잡아 가두고선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살해했다. 중일수색대 중 가장 악랄하기로 유명한 '사카모토' 부대는 밀정을 앞세우고 그해 말까지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인 안동(단동), 환인, 통화, 집안, 임강, 장백 등을 휩쓸고 다니면서 갖은 악행을 일삼는다.

이에 추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족회 청년 조직들도 일제에 맞서 동포사회의 정보를 일본군에 팔아넘기는 밀정을 색출해 제거하고 항일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만주 북쪽으로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다. 당시 동포사회 보호는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이기에 사력을 다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기마토벌대는 신흥무관학교는 물론 우리 동포가 집단으로 거주하던 유가현 삼원포 일원을 습격, 마구 유린했다. 맨 먼저 추산이 타깃이 됐다. 동포사회를 지키는 첨병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추산은 군자금 확보라는 중요한 임무를 은밀하게 수행하고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는 밀정들을 통해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노렸던 것이다. 추산이 순국한 뒤 동포청년들은 삼원포 추가가 마을 뒷산으로 피신해 일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매복해 있던 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으며 왕굴령이라는 고개 밑에서는 12명이나 참살당했다. 당시 이들에게 우리 동포 300명이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고 모두 20명이 희생됐다. 희생된 20명 중에는 '만주벌의 호랑이'로 소문난 독립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의 동생 김동만도 포함됐다.

◆핏빛 만주땅 저주받은 인간사

봉오동 전투의 혁혁한 전승 뒤엔 곧 추산의 순국이 있었다. 그해 10월 청산리 전투 직후엔 김동만이 살해됐다. 일군의 야비한 보복 공격으로 순국한 이들은 안동에서 자발적으로 만주 망명길에 오른 구국에 피 끓는 젊은 청년 항일지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추산의 마지막도 그를 포위한 일군이 총검으로 전신을 난자하는 등 추산의 주검을 수습한 가족들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김동만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목을 칼로 치는 일본군들이 벌인 광란의 참수 만행을 직접 목격한 김동만의 아내는 당시의 충격으로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오랫동안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서간도지역 독립군 조직인 서로군정서의 독판을 맡고 있을 때 이들의 최후에 대해 '일본 군경에 의해 사살된 자의 이름'이라는 문서로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된다.

'한족회 구정(區正) 추산 권기일, 삼강소학교장 김동만….'

당시 석주는 하늘을 보며 통곡하고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눈물로 문서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같은 대규모 간도 학살에 대해 만주를 찾은 영국 선교사 '마틴 풋'은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적었다.

그렇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젊은 나이에 순국했지만 피에 젖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단지 이름 석 자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들의 소임이 극히 비밀리에 수행해야만 하는 독립운동이라서 사진 한 장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항일운동으로 시작된 이 가족들의 고초와 '독립운동으로 스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추산의 항일투쟁은 부인으로 이어지고

전 재산을 처분해 일제와 맞서 항일투쟁에 나선 추산의 고된 서간도 삶은 추산의 부인 김성에게 이어졌다. 김성의 만주 생활은 혹독했다. 세 살배기 아들을 둘러업고 남편의 시신을 수습, 신흥무관학교 인근에 가매장시킨다. 삭막한 만주 벌판에 홀로 남아 만신창이가 된 서간도 살림살이를 더 이상 이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귀국을 결심한다. 특히 추산의 유일한 혈육이고 집안의 주손을 이어갈 어린 아들에게 문중의 대를 잇게 해 주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추산이 순국한 지 2년 만인 1922년 머나먼 고향 안동으로 돌아온다. 일제의 만행을 직접 목도했기에 김성은 이 아이마저 생명을 위협당할 것이라고 우려해 평소 여자아이처럼 앉혀서 소변 보는 버릇을 들이는 등 여아로 속여 일군의 검문검색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고향 안동은 재산이라고는 땅 한 평도 남겨진 게 없어 살기 힘들기는 만주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6년 만인 1928년 다시 그 핏빛의 만주로 향한다. 당시 안동은 벌써 일제와 손을 잡은 친일파 인사들이 거머쥐고 있는 세상이었다. 이들은 추산 집안을 두고 "독립운동 10년 만에 대대손손 이어오던 삼천 석 재산을 다 털어먹고 바늘 꽂을 땅 한 평조차 없는 알거지 살림살이가 됐다"고 손가락질하며 걸핏하면 문중 재산을 다 말아 먹었다고 비아냥거렸다. 특히 감시를 하고 있는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불쑥불쑥 찾아와 가재도구를 뒤지는 통에 고향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광복, 그러나 대를 잇는 후손들의 고난

마적들이 우글대고 일제의 만행에 동포들이 갈가리 찢겨 흩어진 서간도라 하더라도 남편이 묻혀 있는 만주 신흥무관학교는 아내 김성이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곳. 만주를 다시 찾은 김성은 가매장한 남편의 유골을 수습해 신흥무관학교 뒷산 '깨금다리밭'이라고 불리는 양지바른 곳에다 새로이 묻어 준다. 그리고 길림시 빈강현으로 옮겨 날품팔이를 하면서 외아들과 함께 8년여간 모진 목숨을 이어온다. 그러다 김성은 혼란한 시기에 사망한 시조부와 남편, 외아들의 출생에 대한 호적 정리를 위해서 1936년 또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자신이 죽기 전에 열아홉이 된 아들 형순의 호적이라도 바로잡아 놔야만 끊긴 대를 이어 언젠가 해방이 되면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가느다란 희망에서다. 도만 당시 선산군 해평면으로 옮긴 호적도 이때 다시 고향 안동으로 이전했다.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를 피해 호적을 바로잡아 놓고서는 곧바로 만주로 돌아간다.

추산과 그의 부인 김성의 끝없는 가시밭길은 스무 살의 형순으로 다시 이어진다. 만주서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어머니와 어려운 살림을 꾸려오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는다. 소식을 듣자마자 지긋지긋한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안동으로 한달음에 돌아왔다. 추산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형순은 그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가문의 주손으로서 간신히 대를 이었다. 그러나 빈털터리인 그는 고향에서 간장장수를 하며 독립운동으로 스러진 가문 복원에 평생을 애써왔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7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강병두 사진작가 plmnb12@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