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절성 우울증

일조량과 연관…하루 30분 이상 햇볕 쬐면 효과

"추석이 지나면서 기분이 착 가라앉고 손끝 하나 까닥하기도 싫어요. 전화도 받기 싫고 애들 학부모 모임에도 가봐야 하는데 꼼짝도 하기 싫어요. 커튼을 치고 종일 잠만 자고 싶어요. 이상하게도 식욕이 너무 당겨요. 이탈리안 식빵 한 줄 다 먹고, 믹스 커피를 하루에 8잔씩 마셔도 머리가 멍해요. 초콜릿이나 단음식이 너무 당겨서 계속 먹다 보니 2주 만에 체중이 5㎏이나 늘었어요. 애들도 귀찮고 모든 게 짜증스러워요. 때론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덜컥 겁이 나서 병원을 찾아왔어요." 30대 주부 K씨의 이야기다.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 우울증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환절기에 증가한다.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많아지다가 봄이 되면 개선되는 이런 정서 장애를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SAD)이라고 한다.

◆원인

계절성 우울증은 일조량과 연관이 있다. 햇볕을 적게 받고 기온이 낮아지면,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의 분비에 이상이 생겨서 우울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계절성 우울증 환자의 경우 외부의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뇌의 시상하부 능력이 저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북반구의 경우 가을과 겨울, 이른 봄에 우울증이 나타나고 늦은 봄과 여름에는 반대로 기분이 좋아진다. 대개 약 15%가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기분이 좀 우울해지는 걸 경험하고, 그 중 2~3%는 계절성 우울증으로 진단할 수 있다.

◆남녀 간 발병률 차이 있을까?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계절성 우울증도 남성이 더 많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전체 환자의 60~90%가 여성으로 남성보다 훨씬 많다. 가을을 잘 타는 쪽은 남자이지만, 의학적으로 계절성 우울증 환자는 여성들이 많다. 여성에게 더 많은 이유는 기후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우울증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10세 전에 부모와 상실하거나, 죽음'실패'이별'친밀한 사람과의 불화와 같은 생활 사건이 우울증의 유발요인이 된다. 프로이트는 자신과 상실한 대상을 동일시하여, 분노감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허진호 감독)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바람에 이는 댓잎 소리처럼, 한밤중에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처럼 익어간 그들의 사랑은 여름부터 퇴색하기 시작한다. 여자가 '사랑은 변하는 거야'라며 떠나버리자 남자는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두문불출하며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6개월 이상을 그렇게 보낸다.

◆왜 남자가 더 가을을 타나?

의학적으로는 생체시계의 차이로 설명한다. 남성은 생체시계가 가을에 맞춰져 있어서,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에는 남성들의 멜라토닌 분비가 증가되어 기분 변화를 초래한다고 설명한다. 가을이면 중년 남성들의 정신과 상담이 늘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는 점에서 남자들에게 위협적이다. 성취를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남자들은 농부가 추수를 하듯 지난 1년간 이룬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평가를 한다. 못다 이룬 것에 대한 자기 비난으로 의기소침해지기 쉽다. '인생의 정오'를 막 지난 40, 50대에게는 심리적 위기감이 더 심해진다. 오직 목표를 향해 전진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고, 이제 내리막만 남았구나 하는 '상승정지 증후군'(rising stop syndrome)에 시달리기도 한다. 지나간 추억, 못다 이룬 꿈 그러나 이룰 수 없는 무력감을 하소연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남자들이 가을에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데,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계절성 우울증 증상

우울한 기분이 2주 이상 지속되면서, 만성피로'집중력 저하'긴장'초조감 등이 동반된다.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른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 해봐도 이상이 없다. 계절성 우울증은 특이하게도 식욕이 증가하고 과다 수면이 나타나서 많이 먹고 많이 자는 증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체중이 증가할 수 있다. 가을날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면서 살이 찌면 가을철 우울증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치료는 어떻게

일조량 감소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매일 일정 시간 동안 햇볕을 쬐는 광선요법이 효과 있다. 하루 30분 이상, 오전 11시~오후 2시 사이에 밖에 나가 햇볕을 쬐면 비타민D가 생성되고, 망막을 통해 뇌에 도달한 빛은 뇌 속의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킨다.

실내에서는 더 많은 빛을 쬐기 위해 실내 조도를 높이고, 낮에 커튼을 치지 않거나, 사무실에서 창문 쪽을 향해 앉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선글라스는 쓰지 않고 야외에서 햇볕을 쬐면서 걷거나 자전거 타기, 조깅 등의 운동을 하면 더욱 좋다. 또 포만감이 들도록 폭식하지 않는 식습관의 교정도 중요하다.

우울 증상이 2주 이상 심하게 지속될 경우, 항우울제를 복용하거나 정신치료를 한다. 계절성 우울증은 대부분 일조량이 늘어나는 봄이 되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경우가 많다.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도움말'김성미 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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