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46>포항 자장암·대왕바위 가는 길

신라 고승 혜공·원효 법력 겨룬 설화 서린 늦가을의 비경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운제산 자락에 터를 잡은 오어사는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운제산 자락에 터를 잡은 오어사는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거대하고 넓은 오어지는 용이 감싸고 있는 듯한 호수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대하고 넓은 오어지는 용이 감싸고 있는 듯한 호수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어사(吾魚寺)와 12만 평의 오어지(吾魚池)가 있고, 사찰 좌우로 원효암과 자장암 등으로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운제산. 풍수가들은 백두대간을 거쳐 온 많은 영남지역 산 중 유일하게 아직 혈맥이 살아 있다고 운제산을 말한다. 해발 482m인 운제산의 숲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산록이 우거진 데다 주변 풍광도 매우 아름다워 힘든 줄 모르고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울창한 나무를 헤집고 좁다란 오솔길을 걷는 나무터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산의 자랑인 원효암과 자장암은 신라시대 때 원효대사가 명명했다. 기암절벽인 계곡 사이에 두 암자를 지어 놓았으나 수도와 포교를 할 때 내왕이 어려워 구름으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 '구름 운(雲)' '사다리 제(梯)'자를 써서 운제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산속에 있는 사찰은 대부분 능선에 자리 잡고 있지만 오어사는 운제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산세 그윽한 곳에 자리한 명당이다. 자장암은 구름 위에 있는 듯 산꼭대기에 서 있고 원효암은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험한 산 바위절벽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자장암과 사방으로 병풍을 두르며 호반을 끼고 도는 숲길이 일품인 원효암은 자연의 오묘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물의 양이 무려 500만t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고 넓은 오어지는 용이 감싸고 있는 듯한 호수로 눈앞에 그림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몇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운제산의 아름다운 산세가 푸른 하늘에 부드러운 선 하나를 그어놓은 듯하다. 참 곱다. 해 떨어질 때쯤 되니 간결한 수묵화가 따로 없다.

단풍으로 불타고 있는 가을 운제산은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모습이다. 오어사 경내의 주홍빛으로 만발한 꽃들이 행락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자장암과 대왕바위

오어사에서 산위를 올려다보면 높고 험한 바위절벽 꼭대기에 걸려 있는 자장암이 보인다.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가파른 길을 10여 분 오르면 절벽 끝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자장암을 만난다. 가파른 절벽의 아슬아슬한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물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안개 속에 숨은 자장암은 그 은은함이 백미다. 신라 때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암자로 운제산과 오어사를 찾는 탐방객들이 반드시 찾는 필수 코스다. 자장암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운제산에 둘러싸인 오어사와 가을 햇빛에 반사된 오어지의 금빛 물살이 형형색색의 단풍과 조화돼 비경을 이룬다. 푸른 호수에 둘러싸인 오어사의 풍광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자장암에서 오른쪽으로 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삼거리 갈림길. 왼쪽으로 조금 더 임도를 따라 걷다가 만나는 갈림길에서 임도를 버리고 왼쪽 숲길로 들어선다. 코스 전체가 경사가 완만하고 고도차도 별로 없어 힘든 줄 모른다. 더구나 산록이 우거진 융단 같은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기분마저 상쾌하다. 잠시 뒤 다시 콘크리트 임도를 만나서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100m쯤 가면 산여 산불감시초소를 만난다. 초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열린 길로 접어든다. 길이 고속도로처럼 넓고 반질반질하다.

'국민과 함께, 해병대와 함께'라고 적힌 해병대신병교육대의 붉은 현판이 보인다. 좀 더 오르면 벤치가 있는 공터. 왼쪽으로 길을 잡아 오른 지 10분 뒤 '도전'인내'라는 글씨가 적힌 해병대 붉은 현판이 나온다. 운제산은 해병대 신병들의 기초 행군 훈련코스로 알려져 있으며, 해병대 예비역들은 끔찍함과 아련한 추억을 동시에 갖고 있다. 현판을 지나 Y자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느슨한 오르막을 걷는데 갑자기 경사가 심해진다. 헐떡이며 계속 오르니 '깔딱재'라 적혀 있다. 이름만으로는 설악산 봉정암 오르는 길이 생각나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곧이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왼쪽으로 '운제산 0.9㎞' '대왕암 1.5㎞'를 가리키고 있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포항 시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영일만이 눈에 들어오고 포스코를 비롯해 포항산단 업체 굴뚝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왼쪽으로 조금 가파른 길을 오르니 '바위재'다. 곧바로 작은 무덤을 지나서 계속 오르니 운제산 정상 밑 네거리.

운제산 산행에서 대왕암을 빼놓을 수 없어 일단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어 오른 봉우리에 한 산악회에서 만든 운제산 정상석이 있다. 하지만 이곳의 높이는 해발 476m로 운제산 정상은 아니다. 게다가 명색이 정상석인데 산악회 이름은 세로로 크게 음각해 놓고 산이름과 해발 높이는 아주 작게 적어 놓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곧이어 헬기장과 만난다.

헬기장에서 대왕암까지는 불과 5분 남짓이며 길옆의 작은 꽃밭이 앙증맞다. 일명 '천자봉'으로도 불리는 대왕암은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의 꼭대기에 뾰족한 촛대 같은 암벽을 꽃아놓은 듯 말없이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높이 10m, 둘레 30m인 대왕바위는 신라 초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령부인의 수호신이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바위 사이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대왕암 앞에는 '귀신 잡는 해병의 찬란한 전통을 길이 계승하고자 이 대왕암에 해병 혼을 심는다'는 팻말이 서 있다. 1986년 해병훈련단장의 명의로 세워져 해병의 또 다른 전설을 남기고 있다.

길을 되돌려 팔각정이 있는 운제산 정상까지 되돌아가는 데는 10분이면 족하다. 해발 482m의 정상에 세워진 전통 한옥 정자인 팔각정 전망대는 남서쪽의 시루봉에 이르는 산봉우리들과 조금 전 들렀던 대왕암, 그리고 그 사이로 움푹 파인 산여계곡의 가을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조망을 자랑한다. 또 북동쪽으로는 포항시내와 영일만, 그 너머 동해바다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왔던 길을 따라 대왕암을 거쳐 자장암, 오어사까지 내려오면 4시간 정도 소요되고, 아름다운 오어지의 초록색 물빛과 수면 위로 둥둥 떠있는 구름을 보면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잊게 한다.

◆오어사와 원효암

운제산 끝자락인 오어사는 뒤로는 가파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에는 맑고 깊은 오어지가 있어 너무 아름답다. 오어사는 신라시대 사찰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현존 사찰이다. 오어사의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고, 창건은 신라 진평왕 때이나 자세한 창건 내력은 전해오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출세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도 절 아랫마을의 이름은 항사리이다.

오어사 이름과 관련해 신라의 고승 혜공과 원효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두 스님이 법력으로 고기를 살려내는 내기를 했는데 한 마리만 살았다고 한다. 이때 서로 내(吾)가 물고기(魚)를 살려냈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일주문은 오어지 쪽으로 나있다. 몇 개 안 되지만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일주문을 들어갈 수 있어 절집의 높은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일주문에는 근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붓을 둥글게 굴린 행서체의 오어사 현판이 우리 일행을 반긴다. 경내에는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비롯한 당우(堂宇)가 여러 채 남아있다. 대웅전의 빛바랜 법화는 과연 오어사가 신라 4대 조사(원효'혜공'자장'의상)가 수도했던 천년고찰임을 실감나게 한다.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1280호인 동종(銅鐘)과 경상북도문화재 88호인 대웅전, 원효대사가 사용했다는 삿갓과 수저가 있다.

오어사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원효암으로 가는 숲길이다. 다리 위에 올라가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물 반 고기 반'을 바로 실감할 정도로 물고기가 많다. 좁고 가파른 오솔길은 단 5분만 걸어도 때묻지 않은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곡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타나고, 그 길이 원효암으로 가는 길이다. 중간중간 만나는 돌탑들에선 민초들의 소박한 심성이 묻어난다. 그러나 곧장 오르지 말고 물가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 산자락이 끝나는 곳까지 물과 함께 걸을 수 있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산책길이다. 호반을 끼고 도는 데다 잡목이 우거지고 개울도 흘러 마음을 쉴 수 있는 조촐한 맛이 있다. 물과 헤어질 지점에서 산등성이로 난 길을 걷다가 오어사가 보이는 지점에서 저수지 쪽으로 내려서면 다시 원효암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천천히 걸어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원효암의 전각들은 최근에 지은 것들인 데다 일자로 늘어서 있어 깊은 멋은 없다. 절 마당은 못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길에서 바라보는 못은 인공적인 느낌이 전혀 없고 깊은 산속의 천연호수를 방불케한다.

포항'강병서기자 kb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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