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님도 이제 머리 염색해야겠네요."
어느 날 학과모임에서 한 동료가 말했다. 주로 남성 동료와 일하는 내게는 가정생활이나 친구 등 사적인 내용의 대화를 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러나 '머리 염색'이라는 권고는 그동안의 세월을 안고 지내온 사람들 사이에서 우러난 온갖 마음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부부는 맞지 않으면 이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학에서의 직장 동료란 맞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야 하는 사이라고들 한다. 그가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대학이란 직장은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그래서 대학의 동료는 부부보다 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젊은 시절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 젊어서 만난 사람들에게 흰서리가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료의 한창 젊었을 때 모습도 가끔 겹쳐 오면서 동료의 흰머리는 애잔한 마음이 서리게 한다. 그 애잔함이 모든 불편함을 서로 덮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게 되니, 같이 지내 온 동료들뿐만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사람 모두를 동료로 품게 된다.
하회마을 양진당(입암고택) 종부를 인터뷰할 때였다. 그분은 굳이 8월 14일에 와달라고 했다. 낮 동안 내내 인터뷰를 했다. 한옥은 그렇게 더운 날인데도 마루에 앉아 있으면 견딜 만했다. 그러나 그날의 주제는 그 한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양진당 종부는 자신의 시가, 외가 합쳐서 독립유공자 등록이 끝났는데 스물여덟 분이나 된다고 공들여 설명했다.
그 종부는 저녁에 하는 공연을 꼭 보고 가라 했다. 우리는 저녁식사 후 한복을 차려입은 종손 내외를 따라 공연장으로 갔다.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김락(1862~1929) 여사의 생애를 뮤지컬로 올린 것이었다.
김락은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로 안동의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았다.
그런데 시국이 수상하여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함께 나섰다. 1910년 일제가 합병을 하자 시어른은 단식을 시작했다. 그 큰 뜻을 살리느라 단식하는 시아버지 옆에서 식구들의 생활을 챙기는 며느리는 고통스러웠다. 시부는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 등 친정 집안 70여 명이 대거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떠났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남편과 두 아들도 나섰다. 김락 자신은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 중에 두 눈을 잃었다. 일본군이 집안 내력을 보아 심하게 다루었던 듯하다.
앞을 못 보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족사가 겹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은 사망했고, 맏사위 김용환은 체포됐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둘째 사위 류동저, 둘째 아들 이종흠, 나머지 두 아들 모두가 잡혀갔다. 국가, 시가와 친가가 모두 흩어져 내릴 때, 여사는 묵묵히 큰 뜻을 받들며 지내왔다.
여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나는 무엇보다도 이 자료를 발굴한 연구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문화재위원회에 참석했다가 그를 만나게 되어, 김락의 사료를 발굴해 주어 고맙다고 크게 인사했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높은 기개로 산 사람들 옆에는 그만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같은 일의 한 자락씩을 붙들고 상호 도움을 주면서 동료를 인지하게 되는가 보다.
동료의 흰머리를 보면,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는 것'이 학과나 학계를 돕는 일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우리끼리 너무 폐쇄적으로 뭉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공통된 이해와 경험의 흰머리가 만든 세월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김정숙/영남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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