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과 손소의 향나무

수령 550여년, 무수한 가지처럼 후손도 번창

문인화를 그리는 손수용 화백으로부터 경주 손씨 양동마을 입향조 송재(松齋) 손소(孫昭'1433~1484) 선생이 심은 큰 향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갔었다. 그러나 워낙 마을이 큰 데 비해 시간이 없어 관가정(觀稼亭'보물 제442호) 등 몇 곳만 기웃거리다가 종가는 못보고 돌아 온 적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이었다.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나는 마음속에 늘 양동마을을 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퇴직한 동료 임업직 공무원들의 모임인 '임우회'에서 내연산수목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양동마을을 들른다는 쪽지가 왔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한 행사인 것 같아 날아갈듯이 기뻤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아니하기 위해 미리 자료를 모았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제189호)인 양동마을은 송재가 자리 잡은 후 본 손과 외손(外孫)이 경쟁적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안동의 하회나, 성주의 한개마을처럼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양반마을로 자리 잡게 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타성바지들도 살았으나 송재가 풍덕 유씨 유복화의 사위로 들어와 아들과 외손자가 훌륭한 인물이 되자 경주 손(孫)씨와 여주 이(李)씨의 텃밭이 되었다고 한다.

송재는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된 손사성(孫士晟)의 아들이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주서(注書)로 근무하던 중 1463년(세조 9)에 실시된 문예시(文藝試)에서 장원을 하여 성균관 주부로 승진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는 부자(父子)가 함께 근무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박종손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었으며, 내섬시(內贍寺'여러 궁전에 대한 공상(供上),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과 안주, 일본인'여진인(女眞人)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織布) 등을 관리하던 관청)의 책임자로 특진했다.

그러나 효심이 지극한 공은 연로(年老)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성주부사가 되었다. 1472년(성종 3) 병조참의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계천군의 작위를 받았다. 외직을 다시 청하여 안동부사, 진주목사가 되었다. 1480년(성종 11) 건강이 좋지 못하여 낙향 1483년(성종 14) 사직했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관록을 계속 주었으나 아깝게도 52세에 돌아가셨다.

'일에 따라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옛 것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민(敏)이라 하는 뜻'에서 양민(襄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왕조실록' 1484년 (성종 15) 4월 11일자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순박하고 근신하며,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고,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번번이 아버지를 위하여 외방(外方)에 보임되기를 청하였는데, 성주'안동'진주의 세 고을을 맡았을 때에 다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어졌다"라고 하여 극진한 효자이자 훌륭한 관리였음을 알 수 있다.

종가(宗家)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은 1456년(세조 2) 공이 직접 지은 집이다. 당호 서백(書百)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씩 쓴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니 공이 자신을 얼마나 치열하게 단속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당 앞 넓은 공터에 높이 9m, 둘레 3m의 큰 향나무 역시 공이 서백당을 짓고 심은 것이라 하니, 수령이 무려 550여 년이나 된다.

자람이 왕성한 이 향나무처럼 후손도 번창했으니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과 외손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우뚝하다.

우재는 점필재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연산군'중종 3대에 이르기까지 승지를 3번, 대사헌을 4번, 공조, 이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거친 훌륭한 공직자였다 특히, 상주목사로 있을 때 가뭄이 들자 전심전력을 다해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임기가 끝났으나 고을 사람들이 호소하여 연장되기도 했다. 그 후 그를 위해 1506년(중종 1) 사당(祠堂)을 세웠다.

양동마을은 가장 한국적인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고유 수종 중심으로 가꾸는 것이 좋다. 그런데도 종가 출입문 양쪽을 비롯한 몇 곳에 일본 원산의 가이즈카향나무가 심어져 있어 옥(玉)에 티 같았다. 고건축을 전공하는 교수나 조경전문가들이 많이 다녀갔을 터인데도 지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공이 심은 향나무의 무수한 가지처럼 본, 외손이 번창하여 문'무과를 비롯해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고 하니 양동마을이 우리나라 인재의 곳간인 것이 자랑스럽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지구촌 사람들에게 소개되는 것 또한 자랑스럽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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