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7부-세계 속의 경북정신 (4) '연오랑 세오녀'는 일본의 기원일까

설화는 담긴 신라인의 개척정신…신천지 찾아 해양으로 나서다

포항 호미곶 해맞이광장에는 두 남녀의 동상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다. 단순한 조형물이지만 부부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들은 평범한 부부가 아니다. 일본 신화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이들 부부가 일본 소국(小國)의 왕과 왕비가 된 것이 아니라, 일본 황실의 기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8세기 일본 조정에서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도 이들 부부를 연상케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허무맹랑한 설화가 아니라 신라인 혹은 경북인들의 일본 개척사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 신라에서의 흔적

포항에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옛날 이 일대는 도기야(都祈野)라고 불렸는데 영일현(迎日縣)에 속해 있어 삼국유사의 설명과 일치한다.

오천읍 해병대 1사단 안에 있는 일월지(日月池)와 동해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일월사당이 대표적이다. 일월지는 도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데 가장 먼저 해가 돋는 동쪽에 자리해 있다. 논농사에 적당한 곳이다. 못둑 위쪽에 해와 달의 정기를 가졌던 이들 부부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고 신라 때에는 조정에서, 고려'조선 때에는 영일현감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사당은 일제 때 철거됐고 저수지도 일부 메워졌다. 동해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일월사당은 1985년 복원된 것이다.

주변에는 이들 부부에게서 유래된 마을이 많다. 세계리(世界里)와 광명리(光明里), 금광리(金光里)는 '세오녀가 보내온 비단으로 제사를 지냈더니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일광리(日光里)는 일월지를 낀 마을이고, 용덕리(龍德里)는 일월지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데에서 유래됐다.

그렇다면 그 부부는 왜 살기좋은 이곳을 떠나 당시로는 미개의 땅이었던 일본으로 갔을까. 포항대학교 명예교수 배용일(70) 씨의 설명이다. "연오랑 세오녀는 진한 12개 부족국가 중 형산강 일대에 있던 근기국(勤耆國)의 제사장이나 귀족계층인 것 같습니다. 신라는 2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영토를 넓히고 있었는데 신라에 복속되기 싫어 신천지로 떠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연오랑 세오녀는 제철기술과 직조기술을 갖고 있던 지배세력의 실존적 인물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정치적 압박에 순응하지 않고 사제집단, 정치집단, 기술집단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집단 망명이라는게 배 명예교수의 얘기다.

◆ 시마네현에서의 흔적

일본 시마네현 앞바다는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현청은 한국에서 밀려온 쓰레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츠에(松江)와 이즈모(出雲)시 해변 곳곳에는 쓰레기 더미가 널려 있다. 쓰레기를 헤쳐보면 한글 상표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포항과 울산 등 동해안에서 버린 쓰레기가 해류를 따라 도달하는 곳이 시마네현 바닷가이다. 그 옛날 항해 기술이 미비하더라도 배만 타면 자연스럽게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마네현에서는 신라인(혹은 가야인)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현청이 있는 마츠에시의 서쪽에 인접한 이즈모시는 '신화의 도시'로 이름높다. 신사와 사찰마다 일본 건국신화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신라 땅에서 살다 이곳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운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를 모신 신사들이 유독 많다. 일부 한국학자들은 그를 연오랑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신라계 신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일부는 신라왕자 천일창을 연오랑이라 추정한다) 이 이즈모국의 건국신이 낙엽을 날려 도달했다는 곳이 바로 히노미사키(日御埼) 신사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 신사에는 신기하게도 한국신사(韓國神社)가 있었다. 높이 2m의 자그마한 신사였지만 그 감동은 컸다. 나지막한 신사 뒷산 이름도 가라쿠니산(韓國山)이라 불린다. 그 옛날 도래한 신라인들이 산위에 신사를 짓고 고향을 그리며 서쪽 바다를 바라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사노 5대 손자의 98대손으로 대대로 신사를 지켜온 오노 다카요시(小野高慶'47) 궁사는 "원래 가라쿠니산 위에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후 단행된 신사 통폐합 조치에 의해 우리 신사로 들어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조상인 스사노를 신라계로 말하는 학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설이라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시가현립대학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59) 교수는 "기원전부터 6, 7세기까지는 한반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경제적인 목적 등으로 건너와 정착하고 교류했다"며 "그러나 5세기 이전에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즈모에서의 신라와 가야인의 활동상은 여전히 미스터리"라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고대에는 한국과 일본이 아주 가까웠고 왕래가 빈번했다. 한 일본 학자는 경남 지역과 시마네현 사람들의 혈액형 분포가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독도 문제로 경북도와 시마네현이 큰 갈등을 빚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피를 나눈 친인척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큰 역사의 아니러니인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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