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때로는 세대교체, 때로는 물갈이의 대상으로 지목되며 '동네북' 신세가 된 한나라당 소속 대구경북지역 국회의원들은 불편하기만 하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50~60%라던 교체 폭이 새해 들어 70%를 넘어 80%에까지 이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급기야 한나라당의 환골탈태 드라이브를 걸며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비상대책위에서 대구경북 희생론까지 불거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부 인사들은 지역 현역 국회의원들을 향해 '앉아서 선수(選數)만 챙긴 의원'이라고 집단 폄하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자존심도 크게 구겨진 상태다.
이들이 지금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냥 주저앉아 있기만 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없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꾼다.
◆침묵 모드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과도한 평가절하 분위기 탓에 드러내놓고 말도 못하고 침묵 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과 대구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넘은 비난 여론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일일이 대응해 더 주목을 받기보다는 자신들의 내부 역량을 키워 다시 당선되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판단에서다.
본지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낙제점 아래 평가를 받은 다수의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외부 노출보다는 지역으로, 유권자 곁으로를 실천하고 있다. 국회 의원회관은 개점휴업이다.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고 전원 '고향 앞으로' '지역구 앞으로'다. 불가피하게 국회 일정이 있는 경우도 당일치기다. 심야에라도 내려온다.
평소 같으면 보도자료를 내고 반박 성명도 발표하는 등 반응을 보일만 한데도 침묵이다.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공차(空車) 탑승 승객'이라고 매도를 하는 데도 침묵하고 있다. 그냥 침묵은 아니다. '이빨을 깨물고 참는' 침묵이다.
◆살아남는 자가 승자다
겉으로는 침묵 모드지만 수면 아래로는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위기 상황에 몰린 한 재선 의원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을 10년 가까이 했지만 이번만큼 열심히 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역 국회의원의 의정보고회 개최 시한인 11일까지 의원들은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다선이나 초선이나 예외가 없었다. 어떤 이는 초대형 행사를 통해 지지세가 '여전함'을 과시하기도 했고, 다른 이는 소규모 다발성으로 유권자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했다.
의정보고회가 열리지 않아도 잠시도 쉬지 않는다. 어떤 모임이나 어떤 장소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불러주는 것은 물론 불러주지 않은 행사에도 고개를 내민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보기 드문 케이스다. 또 다른 재선 의원은 "열심히 하는 것은 맞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것을 느낀다.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현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저평가는 선거가 임박하면 으레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다"며 "뭐니 뭐니 해도 다시 살아남는 것이 지지자와 유권자들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이라 생각하고 앞만 보고 갈 것"이라고 했다.
◆이유 있는 항변
요즘 현역 국회의원들을 만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억울함과 서운함이 배어 있다. 무능력 집단 내지 무위도식 집단으로 낙인찍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류도 있다.
서울에서든 지역에서든 나름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다는 한 의원도 "국회의원을 모조리 갈아치우자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지역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특별하게 못했다는 평가를 받지도 않았는데 최근의 분위기는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구태청산이라거나 TK 희생이라는 최근 정치권 기류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 전 의장은 이달 5일 재경대구경북인 신년교례회에서 "부정부패에 연루되거나 비리가 있거나 지역민으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솎아내면 될 것이지 왜 지역 전체를 들먹이며 물갈이 지역이라고 그러느냐"고 했다.
◆교체만이 능사는 아닌데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이달 7일자로 보도된 본지 신년 인터뷰에서 현역 의원 물갈이 기류와 관련, "물갈이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공론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면서도 "물갈이가 정치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켰다면 우리나라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정치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김 전 의장은 "우리나라처럼 물갈이가 활발한 나라도 없지만 사람만 바꾼다고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가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구의 한 지역에 도전의사를 밝힌 한 예비후보도 "우리 지역의 경우 국회의원들이 재선, 삼선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사람만 바꾸었지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며 "차라리 이런 식의 교체라면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경중을 가리지 않고, 옥석을 구분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물갈이 무용론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토종 TK에 대한 주장들을 많이 하지만 정작 경쟁력 있는 인물은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며 "그들이 현역 의원보다 일을 잘하고 대구의 발언권을 유지 내지 확대시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짬밥문화가 판치는 국회
물갈이 광풍은 18대 국회에서 다선 의원 기근 현상에 시달리며 국회직과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를 배출하지 못한 쓰라린 경험을 재현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초선만 있으면 19대 국회에서도 대구경북이 '찬밥' 신세가 될 공산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12명과 15명으로 모두 27명이나 있지만 사회경력 불문하고 인사에서는 선수가 최우선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역량 있고 목소리 큰 초선도 필요하지만 관록 있고 서울서도 대접받는 다선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항상 있어왔다. 대표적인 '짬밥' 문화 지대인 정치권에 초선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주장이다.
18대 국회 들어 힘깨나 쓸 수 있었던 한나라당의 주요 당직이나 국회직에 진출한 경우는 많지 않다. 주로 '부'자 달린 자리가 많았다. 원내 사령탑인 원내대표 자리는 대구경북 몫이 아니었다. 선수와 관록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구미의 김성조(3선)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았을 뿐이다. 인사와 살림살이 총책임자인 사무총장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동관기자 dkd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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