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짜고치는 가격담합 소비자가 봉이더냐

늘어만 가는 대기업 횡포

대기업들은 담합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서로가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에다, 만약 발각된다 하더라도 10% 수준에 불과한 과징금 처분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대기업들은 담합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서로가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에다, 만약 발각된다 하더라도 10% 수준에 불과한 과징금 처분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누군가에게 속임을 당하는 일은 마음이 좋질 않다. 더구나 믿음과 신뢰를 보냈던 상대라면 그 배신감은 더욱 크게 마련이다.

연초부터 국민들의 심기가 영 불편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가격담합 혐의로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것. 하지만 더욱 입맛이 씁쓸한 것은 이들 기업이 담합을 자진신고한 대가로 과징금의 상당 부분을 면제받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서 결국 소비자들만 우롱당한 꼴이다. 담합은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이지만, 기업들의 담합행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 추세다.

◆담합, 그 은밀한 유혹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달 12일 이들 두 기업이 국내에서 판매되는 세탁기와 평판TV, 노트북PC의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44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번 사건은 LG전자의 신고로 시작됐으며, 결국 삼성전자는 258억1천400만원, LG전자는 188억3천3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공정위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2008년 6월부터 2009년 9월 사이 세탁기 3개 품목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판촉활동을 자제하기로 한 사실이 적발돼 시정명령과 함께 44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며 "두 업체는 이때 합의한 대로 전자동세탁기 최저가 모델을 단종시키고, 드럼세탁기 소비자판매가격을 60만원 이상으로 책정하기로 담합했다"고 밝혔다. 또 평판TV의 가격을 모의해 보급형 TV 모델의 가격을 인상하고, 판매장려금을 축소했으며, 노트북PC를 출시할 때는 신제품 출시가격을 합의했다.

기업들은 늘 담합의 유혹에 시달린다. 같은 종류의 업체들이 서로 짜고 물건값이나 생산량 등을 조정하면 얼마든지 다른 경쟁 업체를 따돌리거나 부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과 LG의 담합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들 기업은 벌써 최근 2년간 3차례나 담합으로 공정위의 처벌을 받은바 있다.

올해 초 남해화학과 동부, 삼성정밀화학 등 13개 화학비료업체가 농협중앙회 비료 입찰에서 가격을 밀약한 사실이 드러나 828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이들 업체는 무려 16년 동안 1조6천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떠안아야 했다. 2010년 6월 공정위의 조사가 시작된 이듬해 농협중앙회의 비료 입찰에서 낙찰가는 전년에 비해 21%가 낮아져 농민 부담이 1천22억원이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2010년 4월에는 E1'SK가스'SK에너지'GS칼텍스'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등 6개 LPG 수입'정유업체가 2003부터 6년 동안 LPG 판매가격을 담합했다며 모두 6천689억원이라는 사상 최고액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고, 빙그레'서울우유'남양유업 등 12개 유제품 제조'판매 업체들은 2008년 원유가격 인상에 앞서 우유 가격을 인상하기로 담합해 44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또 롯데칠성음료와 해태음료는 2009년 8월 서로 짜고 음료가격을 공동 인상한 혐의로 과징금 240억원을 비롯해 각각 벌금 1억원과 5천만원을 선고 받았다.

◆리니언시, 면죄부인가?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리니언시'(Leniency'관대한 행위라는 뜻) 제도를 통해 과징금의 일정부분을 감액받는다. 담합기업이 범죄 사실을 공정위에 미리 자백하고 조사에 협조하면 과징금을 100% 면제해 주는 제도인 것이다. 담합을 먼저 신고한 업체에는 과징금을 100% 면제하고, 두 번째로 신고한 업체에는 50% 면제한다. 이번에 적발된 사례에서도 LG전자는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고, 삼성전자는 50% 면제받게 돼 결국 삼성전자만 188억원을 납부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이런 리니언시 제도가 오히려 담합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조사 협조를 조건으로 너무 쉽게 면제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리니언시 제도는 미국은 1993년, 유럽연합은 1996년 이 제도를 도입했으며, 우리나라는 1997년에 도입했다. 현재 전 세계 29개국이 이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불공정한 사실을 자진신고하면 과징금 등의 제재를 면해주는 이들 제도를 악용하는 기업이 늘면서 2004년까지 5건에 불과하던 자진신고가 2005년부터는 연평균 10건, 2009년에는 21건에 달할 정도로 크게 늘었다. 담합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대신 꼬리가 길어져 붙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면 먼저 신고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과징금을 부과받은 2009년 LPG 담합 사건에서도 SK는 자진신고를 통해 거액의 과징금을 감액받았다. 1천602억원을 부과받았던 SK에너지는 가장 먼저 자진신고해 전액을 감면받았고, 과징금이 가장 많았던 SK가스는 1천987억원을 내야 할 처지였지만 두 번째로 자진신고해 절반을 감액받은 것. 리니언시 제도 덕분에 3천500억원을 내야 했던 SK그룹으로서는 993억원만 내면 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공정위 측은 "비밀리에 모여 가격 인상을 논의하는 담합 범죄의 특성상 기업의 자백은 증거 확보에 큰 도움이 된다"며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대신 올 초부터 상습적으로 담합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제도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대기업들이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 등을 이용해 리니언시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담합으로 시정조치와 과징금 납부 명령을 받고 5년 안에 또 담합했다면 자진신고를 해도 과징금을 깎아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좀 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해

담합은 시장경제 질서를 훼손하는 다양한 불공정행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행위로 분류된다. 담합을 통해 기업들이 초과이윤을 챙기게 되면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쟁당국이 카르텔(담합) 사건을 가장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걸리지만 않으면 노력 없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국내 기업들뿐 아니라 글로벌 대기업들 역시 담합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공정위가 출범한 후 지난 30년간 적발된 담합 사건은 모두 787건으로 부과된 과징금은 총 2조원에 육박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 연간 20~40여 건에 그쳤던 적발 건수도 매년 늘어나 2008년 65건, 2009년 61건, 2010년 62건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는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한 수단으로 담합행위를 집중 단속하면서 정유사의 주유소 원적관리 담합행위에 대한 과징금 4천348억원과, 생명보험회사들의 이자율 담합에 대해 과징금 3천653억원, 과징금 1천940억원을 부과한 LCD 패널가격 국제담합을 비롯해 우유, 치즈, 두부 등 서민 밀접품목들의 적발도 잇따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담합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이다. 담합을 통해 거둬들인 이익의 10% 수준에 불과한 과징금만을 물다 보니 걸리지 않으면 최선이고, 걸려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10월 적발된 생명보험사들의 이자율 담합의 경우 생보사들의 추정이익은 17조원에 달하지만 과징금은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1천180억원에 불과했다. 또 2007년 경질유제품 목표 가격을 담합했다 적발된 4대 정유사들은 526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지만 당시 담합을 통한 매출액은 1조6천억원으로 소비자 피해 추정액만 2천4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과징금을 상향해 반복된 담합의 가중처벌, 관련자 형사처벌, 소비자 구제제도 정비 등을 요구하는 한편 소비자 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담합행위에 대해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녹색소비자연대 전국연합회는 "두 회사의 담합으로 소비자의 선택권은 축소되고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자 피해가 야기됐지만 리니언시 제도를 악용해 과징금을 거의 내지 않고 소비자에게는 아무런 보상책이 없다"며 집단 소송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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