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 오랫동안 계속돼왔던 사회적 편견이 흔들리고 있다. 모여앉기만 하면 패션이나 화장품 이야기에 열을 올렸던 여성들이 이제는 '변혁의 중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핵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딱딱하고 비장한 방식으로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참여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30대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새로운 해법 마련에 부산할 정도다.
◆패션과 화장품 이야기를 넘어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30대 여성 3명(회사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정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별 관심은 없지만…."이라고 말문을 뗐지만 수다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이들은 "예전과 달리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리 딱딱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통해 언론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다른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진데다, '나는 꼼수다' 등을 통해 좀 더 가볍고 재미있게 정치에 접근하는 방식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송선미(33) 씨는 "마니아는 아닐지라도 '나는 꼼수다'를 가끔 듣기는 한다"며 "일단 유쾌통쾌하다는 점에서 듣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고, 몰랐던 다양한 정치 뒷이야기를 듣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 이후 송 씨는 언론보도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선별해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SNS나 나꼼수의 이야기를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신념에 맞게 걸러내는 정도의 관심은 가지게 됐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김은정(39) 씨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면서도 기존의 권력과 세상의 패턴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토로했다. 김 씨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고 그를 위해 표를 행사할 생각은 갖고 있다"고 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 양극화는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여기에다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한 부도덕한 기업들의 행태도 한몫을 한다고 분석했다. 김 씨는 "근로자들은 100% 원천 징수를 통해 세금을 내지만 기업들은 각종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탈세를 일삼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전혀 관심이 없던 정치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이번 정권 덕택(?)이 크다"고 했다. 특히 임기말 각종 비리와 의혹들이 불거지면서 가뜩이나 살기 팍팍해진 세상에 대한 불만들과 맞물리면서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 노현지(30) 씨는 "이번 대선에서는 여성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며 "아무래도 남성 정치인들에 비해서는 여성 정치인들이 정도를 지키고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 마련 등에 더 세심하게 신경쓴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30대 여성, 정치의 핵으로 등장
30대 여성들이 정치권의 가장 난제이자 총선과 대선 정국을 좌지우지할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등장했다. 특히 새누리당의 경우에는 반 새누리당 성향이 강한 2040 표심의 한가운데 30대 여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산하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참여하는 방식은 기존의 정치권이 행하던 '소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의도 연구소가 지난해 4'27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30대 여성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응답자의 80%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싫다"고 답했던 것. "경제 살린다고 해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찍었더니 오히려 팍팍해졌다""가진 사람들 편만 드는 부자당 아니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게다가 30대는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박원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유권자층이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30대 유권자의 75.8%가 박원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당연히 올해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30대 여성들의 취향 맞추기에 안간힘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 여성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를 학교 급식으로 먹일 수 없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이면서 시위에 유모차부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82쿡''소울드레서''쌍화차코코아''화장발'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여성들 특유의 수다로 정치를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진원지로 조명받았다.
현 정권에 반하는 가장 적극적 진보 정치세력인 '나꼼수'와 '김어준'에 가장 열광하는 세대도 30대다. 특히 김어준씨가 쓴 '닥치고 정치'는 여성의 구매비율이 53.2%로 가장 높았으며, 그 중 30대 여성의 구매 비율이 23.2%로 집계됐다. 또 정봉주 의원의 '달려라 정봉주' 역시 여성 구매 비율이 47.3%, 김용민 교수의 '보수를 팝니다'와 '나는 꼼수다 뒷담화' 역시 40.1%, 49%로 여성 구매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사회적 불안감이 정치 관심으로
이들의 정치 참여에는 감성적 소통 방식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진보주의자는 아니지만 평소 소신에 따라 투표를 꼬박꼬박 하는 정도의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던 교사 이모(36) 씨는 최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전에는 통합민주당의 대표 경선에 선거인단으로 등록해 모바일 투표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씨가 정치 참여자로 변화하는데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스스로를 '나꼼수 광팬'이라고 밝히는 그는 나꼼수 오프라인 콘서트 관람은 물론이고 정치에는 전혀 무관심했던 남편에게까지 '나꼼수'를 전파해 특정 정당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꼼수'를 적극 전파하는 열혈팬이다. 이 씨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가진자만 더 많이 갖는 그런 곳이 아니었으면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의 변화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모(34) 씨는 트위터를 통해 급격히 정치에 관심을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특히 한진중공업 사태로 고공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희망버스'는 그를 열혈 진보주의자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 씨는 "기성 언론들은 외면한 약자들의 목소리를 SNS가 사회적 이슈로 키워냈다고 본다"며 "트위터는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됐다"고 했다.
이처럼 30대 여성들이 사회'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각종 불만과 불안들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지난해 5월 '안티 한나라당 세대, 30대의 정치행태 분석'이란 논문에서 40대인 386세대나 20대보다 반 한나라당 표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계층적 불만, 정치적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꼬집었다. 지난해 2월 동아시아연구원'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30대의 62.7%가 자신이 '하위계층'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삶의 위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진단에 대해 30대 여성들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강지원(32) 씨는 "예전에는 열심히 노력만하면 잘 살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아무리 죽자고 기를 써봤자 별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짙다. 이런 불안감이 사회 변화 요구로 불거지는것 아니겠냐"고 했다.
30대 여성들이 민주적인 환경 속에서 남성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가지고 성장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 세대라는 점도 이들의 정치세력화에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이민주(37) 씨는 "부모님 세대와 달리 한때 X세대라고 불렸던 우리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며 "주위 친구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남편과 친구들에게 전파해 설득하면서 그 영향력을 키워가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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