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문 가야산은 저녁노을로 곱게 물들어 있고/금호강의 달밤은 어부들의 은은한 피리소리에 잠들어 있네/삼포의 가을풍경은 황금색으로 단장하였고/우암으로 나는 매떼는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는구나/길고 푸른 강물 위에는 돛단배들이 백조처럼 오가고 있네/다산에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구름처럼 퍼져 가네/높이 솟은 비슬산은 조는 듯 구름 덮였다/상화대는 늦은 봄을 맞았으며/대평들의 농부들은 태평세월을 노래하네'
강이 흐르고 꽃으로 수놓인 화원동산의 절경을 읊은 '상화대 10경'이라는 한시(漢詩) 구절이다. 낙동강변에 펼쳐진 화원의 여느 가을들녘 풍경은 평화로움과 아름다움 그 자체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가야산에서 수양 중이던 세자를 문병 가는 길에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번을 들렀다고 한다. 마을이름이 '구라리'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경덕왕은 이곳에 행궁을 짓고 그 이름을 상화대(賞花臺)라고 했다.
왜관에서 흘러내려 온 낙동강이 달성군 다사읍에서 90도로 심하게 꺾인 뒤 화원에 이르러서는 180도 방향을 바꿔 흘러간다. 그렇듯 낙동강 물이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나가면서 뭍과 만나는 지점에 화원유원지가 들어섰다.
넓디넓은 백사장과 주변의 경관에 반한 시민들이 최고의 행락지로 손꼽았던 화원유원지. 한때는 버스 종점으로 연중 행락객들로 북적댔지만 이제는 놀이문화가 바뀌고 강변의 옛 정취마저 사라져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화원유원지가 들어선 성산은 북쪽으로 낙동강과 맞닿은 절벽이 있는 천연의 요새다. 옛날 동'서'남편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고 한다.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신라 선덕왕 때 축조한 것으로 그 모양이 잔과 같이 생겼다 하여 '배성' 또는 '잔뫼'라고도 불렸다. 성산이란 명칭도 이때 산에 성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성의 주변에는 30여 기의 고총과 고분이 흩어져 있어 삼한시대 성읍국가 왕족들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정상부분은 조선시대 때는 봉수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봉수대는 서쪽으로 성주의 덕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대구 마천산 봉수대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봉화대 주변에 네 개의 기둥이 서 있었는데 이는 상화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일본인 고관과 장교들의 말을 메는 장소로 알려졌다. 일제가 경관이 좋으면 전국 어느 곳이든 그들만이 독점해 감상했다는 사실이 화원유원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화원유원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당시 화원유원지는 대구의 달성공원, 동촌유원지, 수성못 등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교통편이라고 해봐야 시내버스가 가장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놀이문화도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학생들의 소풍, 동창회, 계모임 등 단체행사를 비롯해 단 둘만의 연인들도 찾는 곳이 화원유원지였다.
현재 화원유원지 주차장 자리에 막걸리, 돼지고기 등을 파는 길거리 장사가 즐비했고, 유원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바탕 놀아주는 전문 풍물패도 한몫을 챙기곤 했다. 일반 식당에서 화원유원지로의 음식을 날라주는 배달업도 인기가 있었고, 아예 가판대를 둘러메고 갖가지 주전부리를 팔러 다니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을 속칭 '방티쟁이'라고 불렀다.
봄과 가을에는 사람이 많이 찾아와 산(현재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사람 머리밖에 보이지 않아 온통 새까맸다고 한다. 돼지를 직접 잡아서 와 가마솥을 걸고 국을 끓여서 먹는가 하면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장구를 치고, 춤과 노래로 일상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특히 회사 등지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올 때는 유원지 근처 식당에 미리 전화를 걸어 물어 본 후 식당에서 정해주는 날짜에 맞춰서 와야만 했다. 손님이 많이 밀리는 날짜를 미리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사진기가 흔하지 않아 화원유원지에는 주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야외출사' 사진사가 10여 명이나 됐다. 손님들이 선호하는 배경은 주로 강변에 떠 있는 나룻배 등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받는 요금은 50원~100원 정도. 한 통에 36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으로 많이 찍을 때는 하루에 세 통까지 찍었다. 즉석 사진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찍은 사진은 다시 대구에 있는 전문 현상소에 맡기거나 아니면 사진사가 직접 인화해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집집마다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화원유원지는 대구 근교라는 지리적 이점과 낙동강변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일본강점기부터 공원으로 개발됐다. 대구역 앞에서 출발해 중앙로를 지나 현재 화원유원지 버스정류장까지 오는 시영버스가 있었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5월 24일 동아일보에서 화원유원지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화원유원지는 대구의 유일한 원유지로 대구부에서 1만여원의 거액을 들여 온갖 시설을 해놓은 30여 리에 위치한 명승지다. 북으로 높이 솟은 상화대는 신라시대 산성터다. 남으로 뻗친 오른편 줄기는 깎은 듯한 절벽으로 낙동강 창파에 다다라 있고, 왼편으로는 우거진 청송대와 영월대가 둘러서 있다. 자연미 풍유한 그위에 인위의 시설을 갖춘 곳이 화원유원지다. 푸른 그늘에 곱게 깔려있는 은잔디, 첫여름의 산뜻한 기운이 옷소매까지 숨어드는 듯하며 물 위에 띄우는 보트, 출렁거리는 물결이 흉금을 통째로 털어주는 듯 절묘한 풍경이다. 여기야말로 백장의 황진속에서 그날그날 부대끼는 도시인들에게 정히 하루의 창서(暢敍'마음을 화창하게 폄)가 있음직한 곳이다.'
40여 년 전쯤까지만 해도 재첩과 홍합이 지천이었다. 모래사장에 손만 넣으면 잡혔다. 조금 물이 깊은 곳 큰 바위 밑에는 너무 많이 붙어 호미 등으로 긁어서 잡을 정도였다. 그물이나 낚시를 던지면 메기, 붕어, 잉어 등이 마구 올라왔다. 말 그대로 '물반 고기반'이었다.
하지만 낙동강 화원유원지 주변 마을은 해마다 여름철 장마나 태풍으로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지금은 낙동강에 쌓은 제방 덕분에 침수되는 일이 드물지만 유독 아랫잔뫼 마을은 대대로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장마 때면 강물이 범람해 애써 심어 놓은 모가 물에 잠겨 녹아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누이들이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도 못먹고 간다는 말이 나오곤 했다.
강물이 넘치면 집안 살림을 모두 지붕으로 옮기고 지붕 위에서 잠을 청하는 일도 허다했다.
연탄을 때던 시절에는 물이 넘어와 쌓아둔 연탄 수백 장이 강물에 허물어지는 광경을 넋을 잃은 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예 장마철이면 2층 높이의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해두고 대비를 하는 주민들도 생겨나는 등 온갖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사정은 화원유원지 내 식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침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할 수 없어서 해마다 침수가 되는 높이만큼 벽에는 타일로 시공해 물이 빠지면 바로 닦은 후 장사를 하는 등 나름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했다.
이처럼 화원의 낙동강은 주민들의 삶을 힘겹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삶의 터전을 마려해 준 생명줄이었고, 최고의 놀이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