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 상리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927호를 따라 충북 단양 방면으로 8㎞가량 가다 보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접경인 음달마을에 이른다. 예천 최북단에 위치한 이 마을은 뒷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진다고 해 '음달'이라 불린다. 현재 이곳에는 예전부터 살던 토박이들이 대다수 떠나고, 귀농인 10가구 20여 명이 오순도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음달마을에서 소백산 저수령(해발 850m)을 넘으면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가 나온다. 저수령을 경계로 경상도와 충청도로 나뉜 두 마을이 말투는 서로 달라도 생활방식이 닮아 한 마을이나 다름없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논농사는 없고 주로 고랭지 채소나 옥수수, 감자 농사가 전부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저수령을 넘어 서울, 충청도로 이동하는 차량이 많았으나, 중앙고속도로 개설 이후 교통량이 크게 줄었다.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황량한 주유소와 휴게소가 과거의 옛 영광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2002년 음달마을이 '산촌생태마을'로 선정되면서 이 마을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효자 도시복이 살았던 마을
예천 상리면과 단양 대강면은 저수령을 경계로 서로 도는 달라도 '도효자로'로 같은 주소를 쓰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도로명 주소제가 시행되면서 '예천군 상리면 도효자로' '단양군 대강면 도효자로' 등 방식으로 표기되고 있다.
도효자로란 도로명은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에서 태어난 효자 도시복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효자 도시복은 명심보감 효행 편과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마을에선 '그 옛날 효자 도시복이 병든 노모가 한여름에 홍시를 먹고 싶다고 하자 사방팔방으로 구하던 중 호랑이를 타고 홍시를 구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주민들은 "효자 도시복이 홍시를 구하기 위해 저수령을 넘어 다녀왔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예천군은 상리면 용두리에 있는 도시복 생가를 12여억원을 들여 '도효자공원'으로 복원해 놓았다. 목조 초가 형태의 도시복 생가, 샘터, 장독대 등 명심보감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도효자공원 곳곳에 조성해 전승하고 있다.
저수령은 한국전쟁 당시 남하하는 인민군들의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전후에는 빨치산이 자주 출몰해 대통령 군령 28호 제7취약지구로 묶이기도 했다. 두 지역 경찰, 공무원, 주민들은 1960년부터 80년까지 3달에 1번씩 투구봉 정상에서 만나 함께 빨치산 수색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에서 40년째 토종닭집을 운영하고 있는 홍원표(70) 씨는 "총격전은 없었지만 공비들이 자주 출몰해 식량과 이불, 옷 등을 뺏어가곤 했다"며 "당시 나라에서는 빨치산과 구분해 화전민들을 마을로 이주시키려고 땅을 3천 평씩 줬다"고 말했다.
예천 상리면은 우리나라 시조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역동 우탁 선생과도 인연이 깊다.
예천군 상리면 도촌리는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태어난 역동 우탁 선생이 고을 수령과 감찰규정 벼슬을 거치고 낙향한 뒤 자리를 잡은 곳이다. 우탁 선생은 이곳에서 휴휴암이란 암자를 짓고 주역을 연구하기도 했다.
◆도(道)는 달라도 우리는 하나
1994년 예천군과 단양군을 잇는 지방도 927호선이 개설되면서 양 지역 주민 간 교류도 더 활발해졌다. 이 지방도는 강원도 원주에서 경북 구미 쪽으로 가는 지름길이어서 버스가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당시에는 교통량이 제법 많아서 휴게소에는 차들이 북적이고 식당도 운영이 잘되는 곳이었다.
예천군 상리면과 단양군 대강면 주민들은 27년째 친선 교류행사를 해오고 있다. 2도 2면 친선 교류는 1984년 상리면 상리와 대강면 올산리 두 지역 청년회가 배구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교류가 시작됐다. 1995년 두 마을 주민이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로 확대돼, 본격적인 면 대 면 교류 행사로 발전했다.
1992년 상리면의 70대 노인이 봄나물을 뜯으러 소백산에 올랐다 실종된 것을 두 지역 주민들이 합심해 도솔봉 일대를 샅샅이 수색한 끝에 구조했다. 이 사건으로 두 지역민은 더욱 끈끈한 이웃애로 '하나'가 됐다. 이후 두 지역 주민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배구, 족구 등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한마당 잔치를 갖고 화합과 친선을 다져오고 있다.
황진욱 예천군 상리면장은 "저수령은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험한 고개였으나 1994년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주민들의 왕래가 잦아졌다"며 "소백산을 경계로 한 이웃마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웃애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음달마을 안성규(58) 씨는 도 경계를 넘나드는 삶을 살고 있다. 안 씨는 40여 년 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에 있는 소백산관광목장에서 일을 하다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음달마을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표고버섯 농장을 운영하며 연간 1억원의 농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안 씨는 "저수령을 경계로 서로 도는 다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며 "시시때때로 체육행사를 가지면서 집안 대소사와 안부를 묻는 등 저수령 고개를 넘나들면서 친분을 쌓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두 마을은 잦은 혼인관계로 인해 친인척들이 많다.
60년 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에서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음달마을로 시집온 고순조(78) 할머니는 "내 나이 18세에 신랑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양쪽 어르신들이 저수령 고개를 넘나들며 친분을 쌓은 때문이었다"며 "당시만 하더라도 차가 없어 가까운 두 지역 주민들끼리 결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새 활로를 모색하는 마을
현재 저수령을 넘는 지방도 927호선을 이용하는 차량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죽령터널이 뚫리면서 주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한 탓이다. 이 때문에 저수령휴게소와 남쪽 2㎞가량 떨어진 용두휴게공원은 지금 거의 폐업상태가 됐다. 요즘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차량이 몇 대 정도 서 있고, 일부 찻집만 운영 중이다.
하지만 최근 웰빙바람과 함께 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이 인기를 끌면서 이 마을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천 상리면 용두리 주민들은 그동안 배추와 고추, 호두 농사를 지으면서 어렵게 살아왔지만, 2002년 '산촌생태마을'로 선정되면서 생활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가 13억원을 투입해 마을진입로를 넓히고, 농산물 생산기반시설을 확충, 마을의 주요 소득원이 표고버섯과 곶감, 오가피, 송이버섯 등 고소득 작목으로 다양화됐다.
특히 예천군 상리면 용두휴게공원이 지난해 말 산림청이 시행한 목재체험장 조성사업 공모에 선정돼 이곳 주민들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저수령휴게소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김치년(58) 씨는 "중앙고속도로 개설로 차량 수는 크게 줄었지만 등산, 산악자전거, 드라이브 등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엄동일 이장은 "예천군이 목재체험장 조성부지를 용두휴게공원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이를 기필코 막을 것"이라며 "당초 군의 계획대로 목재체험장이 조성될 수 있도록 주민 서명운동 등을 벌일 것이다. 효자공원과 목재체험장을 연계한 관광코스 개발로 과거의 옛 영화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두리 새마을지도자 정동섭(56) 씨는 "중앙고속도로로 인해 차량이 끊기면서 그 많던 식당과 휴게소, 주유소 등이 대부분 문을 닫았고, 각종 개발사업까지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군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다"며 "목재체험장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천'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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