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장세정(하)

죽죽 뻗어가면서도 청초한 창법으로 심금 울려

작사가 강사랑이 엮은 '한국레코오드가요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성우의 대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레코드를 전축 위에 걸어놓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들으면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아우성치던 부산항 제2부두의 광경과 소음들이 생생하게 재현이 됩니다.

대사: 현해탄, 그곳은 한 많은 해협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여기를 드나들면서 마음대로 실어가고 또 마음대로 실어다 팔았습니다. 부산항, 그 한 많은 부두에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의 한숨이 점점이 서려 있고, 관부연락선 그 연락선 갑판 위에는 피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젖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일본을 가려면 먼저 본적지나 거주지에서 도항증명서를 내야했습니다. 이 도항증명서도 부산경찰국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오로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도항증명서의 확인을 받아야 하고, 보따리나 몸수색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구둣발로 차이며 따귀를 얻어맞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단 하나뿐인 아들을 '산 설고 물 선' 일본 땅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니, 여기 이 노래는 그야말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삶과 한을 다룬 노래 '연락선은 떠난다'를 불렀던 가수는 장세정입니다. 그녀는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단에 들어갔다는 아버지는 소식도 없고,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지요. 10대 후반, 장세정은 평양 화신백화점의 점원으로 취직해서 일했습니다. 백화점에서도 악기점 일을 보았지요.

드디어 1936년 늦가을, 장세정은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가요콩쿠르 무대에 올라서 자신의 노래를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박수와 환호가 터졌습니다.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이 마침 평양에 왔다가 장세정의 이런 모습과 만나게 되었고, 단번에 서울로 스카우트해 갈 결심을 했습니다. 이후로 이철 사장은 장세정을 몹시 어여삐 여긴 듯합니다. 장세정이 서울로 간 뒤 '연락선은 떠난다'와 같은 빅 히트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철 사장의 특별한 지원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케에서는 장세정 음반을 소개할 때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란 문구를 꼭 넣었습니다.

흔히들 장세정 창법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죽죽 뻗어나가면서도 가볍게 코에 걸리는 달콤함을 속으로 간직한 창법, 혹은 청초한 색기(色氣)를 느끼게 하는 창법이라 하지요. 장세정의 대표곡으로는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 '처녀야곡' '역마차' 등이 있습니다.

장세정은 그녀의 노래를 너무나 사랑했던 한정식과 결혼에 골인합니다. 한정식은 아내 장세정의 무대 활동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오페라, 악극단 공연 등으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장세정은 대구로 피난 내려와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이 무렵,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고향초' '즐거운 목장' 등의 음반을 발매하고 히트시켰지요. 1970년대로 접어들어 장세정은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카나리아다방에 나와서 즐거웠던 추억담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명암, 박영호 등의 월북 작사가 작품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장세정의 노래들은 거의 금지곡 목록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뼈저린 아픔 속에서 장세정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게 됩니다. 1978년 장세정은 미국 LA에서 은퇴기념공연을 펼친 뒤, 2003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머나먼 타국에서 고단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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