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사/도널드 서순 지음/오숙은, 이은진, 정영목, 한경희 옮김/뿌리와 이파리 펴냄
18세기 오페라하우스는 20세기의 나이트클럽 같았다. 귀족계급은 공연시간 정각에 도착하는 것을 촌스럽다고 여겼다. 음악을 경청하거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장사꾼 같은 부르주아나 하는 짓이었고, 무대에 관심을 갖는 건 사교적 결례였다. 공연 내내 대화가 오갔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1800년대 유럽인 대부분은 읽거나 쓸 줄 몰랐고, 책을 사볼 돈도 없었다. 즐길 수 있는 음악도 동네 교회나 축제에서 무료로 듣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2000년대 유럽인 대부분은 다양한 출판물을 읽고 어디서나 음악을 들으며 영화나 공연을 즐기고 인터넷을 이용한다. 문화적 궁핍 상태에서 문화를 선별해 소비하는 문화적 풍요 상태로 변한 셈이다. 그동안 온갖 종류의 문화산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경계는 수시로 변했다.
'유럽문화사'는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200년간 유럽 사람들이 생산, 유통, 소비해 온 거의 모든 문화 형식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문화를 상품으로, 문화시장을 '마케팅'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부유층과 엘리트 계층이 즐긴 고급 문화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고된 삶을 위로하는 저급 문화와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생산, 유통됐으며 대중들에게 판매, 소비되는지에 주목한다. 소설 작품의 내용이나 질을 따지기보다는 작가, 출판업자, 서적상, 독자 등으로 구성된 상업적 그물망과 인쇄 부수, 작가의 벌이와 위신, 해적판과 저작권, 인쇄기술이 소설의 생산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식이다. 저자가 상대적으로 한정됐고 유일무이한 물건으로 투기시장인 미술 시장 대신 복제 가능한 미술품만을 다룬 이유다.
모두 5권, 2천79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책 제목은 '유럽문화사'이지만 유럽 대륙은 물론 러시아와 미국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과 시기, 주제를 다룬다. 제1부 '서막'(1800~1830)에서는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문화산업이 귀족의 전유물에서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을 폭넓게 살펴본다. 제2부 '부르주아 문화'(1830~1880)는 18세기 들어 부르주아지가 핵심적인 문화소비자로 떠오르고, 늘어나던 노동자 계급이 싸구려 연재소설과 정기간행물을 소비하기 시작한 과정을 살핀다. 제3부 '혁명'(1880~1920)에서는 문화의 확산에 혁명을 일으킨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축음기가 발명돼 음악의 소비와 생산을 완전히 바꿨고, 영화의 등장으로 대중적인 문화산업이 시작됐다.
제4부 '국가'(1920~1960)는 문화에 대해 국가가 개입한 상황을 다룬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 소련과 파시즘이 지배했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 등 권위주의 국가들이 특정 문화를 강화하고 방송을 장악한 시기다. 미국은 영화산업과 대중음악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문화적 패권국으로 도약했다. 제5부 '대중매체'(1960~2000)는 미국이 전 세계의 문화적 패권을 쥐고 흔든 시기다. 특히 텔레비전이 대중매체로 발달한 과정과 대중음악의 성장, 인터넷이 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해리포터' '슈퍼맨' '오페라의 유령' '쥐라기 공원' 등 익숙한 작품들이 등장하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관심 있는 주제만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484~672쪽. 각권 2만8천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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