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인(60) 대구공업대 뷰티아트디자인학부 교수(학부장)는 한국 분장사의 산 증인이자 한국 분장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다. 분장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 그는 분장업에 뛰어 들어 한국 분장사의 새 장을 개척하며 40년 외길 인생을 걸어 오고 있다. 1997년부터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그는 최근 분장 인생 40년의 노하우를 담은 책을 펴냈다. 드라마'연극'뮤지컬'오페라 무대 현장을 누비며 몸으로 체득한 분장 기술을 후학들에게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서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배우와 극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에 평생을 바친 장 교수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화가→배우→분장사
어릴 적 장 교수의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사생대회에 나가면 어김없이 입상할 정도로 그림 그리는 재능을 타고났다. 대구 달성초등학교를 거쳐 대건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미술반 활동을 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미술 교사의 권유로 고교도 대구가 아니라 서울(서라벌고)로 진학했다. "내로라하는 예체능계 인사 중에서 서라벌고 출신이 많아 인문계 학교이지만 예체능 분야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당시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그림 공부시킬 요량이면 서울로 보내는 것이 좋다고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리는 바람에 고교생으로는 드물게 1960년대에 서울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학 시절, 그는 미술학도가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 차근 밟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본 것이 계기가 돼 배우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혼을 바쳐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라벌고 선배인 배우 안병경 씨를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았습니다. 연기학원에도 등록해 수업을 받으며 배우의 꿈을 키웠죠."
하지만 배우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교 2학년 때 동양방송국 견학을 갔다 분장실 모습을 보고 다시 장래 희망의 궤도를 수정했다. "당시 사투리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사투리를 잘 써야 좋은 배우 대접을 받지만 옛날에는 배우가 사투리를 사용하면 바로 퇴출이었습니다. 사투리를 고치는 일이 쉽지 않아 좋은 배우가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방송국 분장실에서 분장사를 만났습니다. 분장사의 손길에서 새로운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분장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됐죠."
고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미대에 진학한 장 교수는 동양방송국 분장실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하며 분장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바이트인 셈이죠. 분장실에서 배운 기술로 학교 연극반 학생들의 분장을 주었습니다. 당시 제 단골 학생 중 한 명이 바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입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한 1976년, 동양방송국에 정식으로 입사, 본격적으로 분장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행착오 통해 분장 역사를 개척
장 교수가 동양방송국 분장실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은 분장의 불모지였다. 당시 방송 3사(동양방송'KBS'MBC)와 영화사 등에 소속된 분장사는 전국을 통틀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게다가 분장사들은 체계적으로 분장을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동양방송국 분장실에는 2명의 선배 분장사들이 있었는데 모두 배우 출신이었습니다. 배우 때 거울 보며 스스로 분장을 하다 분장사가 된 분들이었죠. 그분들 밑에서 분장을 배웠죠."
교육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아 분장을 배우는 일은 어깨너머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일은 상상도 못했죠. 선배들이 하는 것을 유심히 봐두었다 기회가 주어지면 기억을 되살려 분장하는 방법을 통해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선배들도 분장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분장 1세대들은 일을 하면서 분장 이론을 하나하나 만들어 갔던 까닭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고 했다. "배우에게 수염을 붙인 뒤 가위로 다듬는 과정에서 배우의 입술에 상처를 내는 일도 부지기수였죠. 분장에 사용하는 화장품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 직접 분장 재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냥 재로 눈썹을 그리고 수염 붙이는데 쓰이는 송진을 구하기 위해 산도 많이 누볐습니다. 콜드크림에 백분과 식용 색소, 밀납을 넣고 끓이면 분장용 색조 화장품이 만들어지는데 분장실에서 화장품을 만들다 불을 낸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실수를 하며 분장의 역사를 한 줄 한 줄 만들어 갔습니다."
올 6월 장 교수는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담은 책 '분장의 정석'을 펴냈다. "우리나라에 분장 관련 책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 번역서이거나 외국 서적을 응용한 책이라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외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은 두상이 다르기 때문에 외국 책을 보고 분장을 하면 올바른 분장이 되지 않습니다. 책은 잘 보면 득이 되지만 잘 못보면 독이 됩니다. 분장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초가 될 만한 지식을 담았습니다."
◆지역 최초 분장 관련 학과 신설
장 교수는 동양방송 분장감독과 KBS 분장감독, 호암아트홀 분장감독 및 무대감독을 거쳐 1997년 한 대학으로부터 뷰티과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고 대구로 내려왔다. "당시 대구는 분장의 황무지였습니다. 분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배우고 익힌 것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 대학의 제안을 받아 들여 대구경북에서는 처음으로 뷰티과를 신설했습니다. 제가 개설한 뷰티과를 시발점으로 우후죽순처럼 뷰티과가 생겨 났습니다. 지금은 대구경북에만 25개가 넘는 뷰티과가 개설되어 있습니다."
장 교수는 2004년 뷰티과 개설 책임자로 대구공업대에 스카웃될 만큼 이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분장 관련 학과를 개설해 후진 양성에 힘써 온 덕분에 지금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수천 명을 훌쩍 넘는다. 대구경북뿐 아니라 서울 등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은 장 교수의 재산목록 1호다. 장 교수의 뒤를 이어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수도 나왔다. "제자들이 관련 분야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기초 위에 분장의 새로운 살을 하나하나 붙여 나가는 제자들을 보면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장 교수는 지금은 뷰티과가 너무 많아 문제라고 했다. "붐이 일어나면서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뷰티과를 개설한 대학이 180여 곳에 달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고 학생 수가 많아지다 보니 취업 문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분장 외길 인생이 남긴 것
지금까지 장 교수의 손을 거쳐간 배우와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 이낙훈 씨를 비롯해 이순재'이덕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장 교수를 통해 극 중 인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드라마 '서울야곡' '달동네' '연산군' '장희빈' '서울뚝배기' '전설의 고향' 'TV문학관', 연극 '햄릿' '오델로' '리어왕', 오페라 '나비부인' '사랑의 묘약' '아이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수천 편의 작품 분장을 맡아 한국 공연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또 2000년 경주세계엑스포 개막식,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개'폐회식,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개'폐회식 분장을 담당했으며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대구호러페스티벌 예술감독도 역임했다. 2003년에는 분장사로는 처음으로 전국연극제에서 '무대예술상'도 받았다. 모두 분장 외길 인생을 걸어오면서 쌓았던 실력이 가져다 준 영광이었다.
40년 동안 오로지 한길을 묵묵히 걸어 온 까닭에 직업병도 갖게 됐다. 그는 오전 4시 30분 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분장일을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분장사가 많지 않았던 시절, 사극 촬영 한 번 나가면 엑스트라까지 수백 명을 분장해야 합니다. 촬영 일정에 맞추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죠. 대학 교수가 된 이후 새벽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는데도 기상 시간은 같습니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장 교수의 손에도 40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끝마디가 굽어 있다. 붓 대신 손을 사용해 분장을 하는 습관 때문이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손으로 분장을 합니다. 감각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 더 섬세하게 분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화장품을 바르는데 많이 사용되는 새끼손가락이 휘어졌습니다."
◆"분장박물관 세우는 것이 꿈"
장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분장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시작은 미미했지만 분장 이론을 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 분장사가 되기를 잘 했다는 것. 그는 분장 기술서를 분야별로 나누어 시리즈로 발간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기초 이론서입니다. 앞으로는 수염 붙이는 법, 캐릭터 만드는 법 등 장르별 상세 기술을 설명한 책을 1년에 1권씩 시리즈로 낼 계획입니다."
장 교수는 분장사로는 처음으로 화랑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1999년 청운갤러리에서 데드마스크(안면상)를 이용한 전시회를 가진데 이어 2001년에는 고토갤러리에서 배우들의 표정을 이용한 분장 사진전을 개최했다. 그는 내년에는 삽화전을 열 계획이다. 장 교수는 분장일을 시작하면서 늘 삽화를 그려왔다. 그가 삽화 그리기에 천착한 이유는 분장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장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극에 맞는 캐릭터를 창조하려면 끊임없이 다양한 군상들을 그려보며 연구해야 합니다. 내년에 가질 삽화전의 제목은 '세상 살며 들은 이야기, 본 그림'입니다. 캐릭터 공부를 위해 틈틈히 그린 세상 풍경과 소감 등을 써 놓은 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장 교수는 퇴직 후에는 분장박물관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제 작품과 소장품 등을 전시하고 분장체험도 할 수 있는 분장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원을 받으면 조금 크게 짓고, 후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비를 들여 자그마한 분장박물관을 개관해 제가 가진 것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생각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장 교수는 물갈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겉으로 보면 우리 사회는 활기차보입니다. 하지만 물갈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정체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후배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길을 열어 주어야 후배가 저를 뛰어 넘어 제가 못한 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죠." 후학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도 모자라 아름다운 퇴장까지 준비하고 있는 장 교수. 그의 말과 태도에서 분장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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