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성에 혜민서·활인서…정조 때 기록에는 "유명무실"

조선 후기 백성들에게 주어진 의료 혜택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에 일부 관련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한성에 있는 혜민서와 활인서의 기록일 뿐 경외(한성 이외 지역) 백성들이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는 기록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중원문화재연구원 이규근 박사의 논문 '조선후기 질병사 연구-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 발생 기록을 중심으로'를 통해 국립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의 성격과 역할을 찾아볼 수 있다.

혜민서는 주로 도성 내 백성들의 질병 치료를 담당했다. 혜민서는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병이 생긴 집에서 부르면 찾아가 치료하기도 했다. 아울러 약재를 구입해 구급약을 만들어 전매하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국내산 약재의 공급과 외국산 약재를 구입해 전매하고, 이를 원료로 청심원 등 구급약을 제조'판매했다. 혜민서 하부기구인 전매청이 이를 담당했다.

하지만 약값이 너무 비싸서 약재를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실록(세종 22년)에는 '혜민서에서 팔고 있는 약값은 너무 비싼 탓에 대소 병가에서 구입해 병을 구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가장 귀한 청심원'소합원'보명단 외의 나머지 약은 값을 다시 정하도록 하소서'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반들도 약재를 구하기가 어려운 마당에 백성들이 약 한 첩을 쓰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리라. 게다가 중국에서 수입된 '당약재'는 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다.

활인서는 질병 치료보다는 빈민구제의 성격이 더 강했다. 도성민들의 중병을 구활하기 위해 설치됐지만 천연두나 계절성 전염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성 밖에 나가 치료받도록 했고, 전염병이 크게 돌거나 굶주린 백성이 많이 발생할 때엔 아예 활인서를 도성 밖 더 멀리 옮기기도 했다. 사실상 활인서의 질병 치료는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하는 방법이었다.

1784년(정조 8년 정월 12일) '비변사등록'에 이런 대목이 나와있다. '지금 여역(전염병)이 치성(불길처럼 일어남)하는데 지금 육로가 모두 흉년이 들었으며… (중략)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부에서 설치한 혜민서와 활인서 양서가 모두 유명무실하므로… (중략) 병자를 안접하고 약이 없는 자는 약을 주도록 하였으나 서울이 이 지경이라면 외방은 어떠하겠는가.'

18세기 들어 활인서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활인서가 아니라 살인서'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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