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발코니의 손자 손녀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국의 손자 손녀에게 따스하고 예쁜 내복이라도 한 벌씩 사서 보낼까 하고 집사람과 함께 동네 시장엘 갔었습니다. 내의 가게에 들러, 녀석들의 나이를 대며 가장 좋은 걸로 서너 벌씩 내놓아 보라고 했더니, 가게 아줌마가 "우리 집에서 아동복 취급을 안 한 지가 언젠데, 지금 여기 와서 아이 옷을 찾으시면 어쩌누. 요새 누가 아이를 낳아야 말이지…"하며 혀 짧은 대답을 건네 왔습니다. 아이들 옷은 갖다 놓는 족족 재고로만 쌓여서 벌써부터 취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 내에 두서너 개 있던 아동복 전문가게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귓가에 달고 돌아오는데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섬뜩하게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울음소리나 재롱이 사라진 집에서 살아온 지도 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딸애가 결혼해서 공부하러 미국으로 건너가고, 막내 녀석마저 유학길을 찾아 곁을 떠나갔을 무렵에는, 마치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의 저물녘처럼 텅 빈 집안이 허전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는데, 어느새 그 적막함에 익숙해져 허전함을 단출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가 봅니다.

하나의 주거 공간 안에서 자식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이 오롯이 부부만 남았을 때 가장 불편한 장면은 아무래도 소소한 일에 의견이 달라 미묘한 감정다툼이 일어날 때가 아닐까 합니다. 무작정 꽁하게 며칠을 보내면서 서로의 감정이 삭아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더구나 지난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낮시간에도 집안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이 문제가 더욱 버겁게 다가왔는데요.

늘그막의 남정네들 처지란 게 인명재처(人命在妻)요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이라고 하던가요. 집사람과의 전쟁은 아무리 작아도 언제나 힘들지요. 그 한랭전선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제가 자주 쓰는 작전이 두어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뜬금없이 국제전화로 딸자식을 불러내어 손자 손녀들이 커가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게 하는 것이고, 그게 시차 때문에 여의치 않으면 발코니에 나가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새로 배치하고 물을 주며 가지를 손질하다가 새로 돋은 가지나 꽃이라도 한 송이 보이면 그걸로 꽃을 좋아하는 집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인데, 나름대로 성공률이 높았습니다. 아니, 집사람도 처음부터 제 작전을 눈치 챈 듯 '당신이 퇴직하고 달라진 건 우리 집 국제전화 요금이 치솟는 것과 발코니 꽃나무들의 팔자'라는 푸념에다 살짝 웃음을 섞습니다.

집 발코니에는 서른 개 남짓 되는 화분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따라온 것들과, 무슨 큰일을 앞두고 장모님이 사다 놓으신 철쭉을 비롯하여, 직장 사무실에서 두고 보던 화분들로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냥 헤어지기는 서운해서 데려온 것들입니다. 원래는 예순 개도 훨씬 넘었지만 그간 잘 돌보지 않아 시들시들 앓다가 결국에는 말라비틀어져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버려진 것이 많았습니다. 녀석들에게 죄를 많이 지었지요.

발코니를 자주 드나들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녀석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었지요. 참 무심하게도 같은 집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면서도 이름도 몰랐던 것이지요. 그리고 수년 만에 분갈이도 해주고 비료를 사와 뿌리 근처에 묻어주고 영양제를 물에 타서 떠먹여 주기도 합니다.

식물들도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생각하고, 사랑을 한다는 게 맞는가 봅니다. 제가 다가가는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정다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이 이제 자식이고 손자입니다. 아니, 제가 녀석들을 어르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녀석들이 되레 제 일상의 텃밭에 난 잡초를 뽑아주고 북을 돋워 튼튼하게 서도록 도와줍니다. 오랜 도시 생활에서 잃어버린 하늘을 찾아 가지로 가리켜 보이고, 또 뿌리로 좁은 화분 안의 흙을 움켜쥐어 보이며,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의 의미를 깨우쳐주기까지 하는 녀석들입니다.

구정을 앞두고 요즘 집사람의 손자 손녀 생각이 부쩍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봄에 녀석들을 만나러 열다섯 시간의 긴 비행을 힘겹게 견뎌내며 다녀왔으면서도, 녀석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부터 적시며 괜히 주방으로 가 빈 그릇을 떨그럭거립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울보 할미'라 놀리며 발코니로 나갑니다. 발코니의 꽃나무들에게, 이제 엄동설한의 터널도 이만큼 지나왔으니 어서어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라고 채근합니다. 손자 손녀들을 가까이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쪼르르 달려가 보며 살기란 틀린 게 분명하니, 너희들이라도 곁에서 재롱을 피워 저 울보 할미를 달래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졸라봅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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