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섣부른 봄

임기가 한 달도 채 안 남은 이명박 대통령이 측근과 사돈집 인사를 비롯한 77명을 특별 사면했다. 반대 여론이 많았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등 돌린 국민이 많으니 아예 안면 몰수를 작심한 듯하다. 그러나 이는 임기 말 때마다 있은 관행이자 대통령 권한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오랫동안 함께 일한 관리를 포함한 129명에게 훈장을 주었다. 둘 다 대단한 특혜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임기가 남은 대통령께서 한 일이니 잘했다고 해두자.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논란 중이고, 총리 후보자는 스스로 물러났다. 개인 판단에 따랐겠지만, 억지를 좀 쓰면 박근혜 당선인이 지명한 후보여서 박 당선인이 한 일과 마찬가지다. 검증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잘못 지명한 것이 됐지만, 스스로 물러났으니 이것도 잘된 일이라고 하자.

이 세 사례에는 재미난 연결 고리가 있다. 헌재소장 후보자는 당선인의 뜻을 반영해 현 대통령이 지명했다. 특사는 현 대통령, 총리 지명은 차기 대통령 작품이다. 이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다면 현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이 절묘하게 1.5개씩 가르고 있다. 처음과 끝의 시점도 거의 비슷하다. 헌재소장 후보자의 검증이 시끄러울 때 대통령 특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차기 정부 총리 인선 문제가 관심을 끌었다.

백미는 특사와 총리 후보자 사퇴의 절묘한 타이밍이다. 특사는 29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결정됐고, 총리 후보자 사퇴는 이날 오후 7시쯤이었다. 사퇴 전까지는 신문의 주요 톱 뉴스가 특사와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뒤늦은 총리 후보자 사퇴가 이를 완전히 뒤엎었다. 과거,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 반발이 거셀 때마다 족집게처럼 잡던 대규모 간첩단 사건 같은 느낌이랄까? 빛바랜 흑백 영화의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아련함이 아니라 씁쓸함이었다.

앞에선 잘했다고 해둔, 특별사면을 보자. 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조선시대에도 사면은 백성을 위한 왕실 비장의 카드였다. 흉년이나 기근 등이 명분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 대통합이다. 그러나 뇌물 수수 등 중죄를 저지른 자는 사면하지 않았다. 이를 어긴 대표적인 사례가 조말생이다. 사형까지 당할 만한 뇌물 수수죄 등이 드러난 조말생은 당연히 사면 대상이 아니었지만 세종은 특별사면했다. 이 사례는 세종의 성군다움을 나타내는 한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탁월한 인재를 아낀 세종이 다른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면 대상자의 대부분은 죄만 크고 인재는 아니다. 인재라 하더라도 요즘처럼 인재가 수두룩 빽빽한 세상에서는 그들이 감옥에서 죗값을 충분히 치러도 나라가 돌아가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다. 오히려 형을 마칠 때까지 감옥에 내버려 둬 앞으로 권력에 빌붙어 나쁜 짓을 할 만한 인사에게 경고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민의 뜻과 달랐다.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추의 무게는 권한 남용에 가깝다.

법과 관례에 어긋나지 않아도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있고, 이를 깼을 때 칭송받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이번 특사는 칭송을 손가락질로 바꾼 것과 같다. 국민으로부터 받을 보이지 않는 칭송이나 손가락질보다 사면된 사람들로부터 받을 '용비어천가'가 더 마음에 들더라도 이는 확실하게 잘못한 일이었다.

섣부른 봄 이야기나 해보자.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을 구경하기 어려운 대구와 남부 지방에 폭설이 잇따르고, 바람까지 세찼다. 그런데 최근 며칠은 많이 따뜻했다. 그래서 중국 북송(北宋) 때 재상 구준(寇準)의 강남춘(江南春)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파묘묘 류의의(波渺渺 柳依依) 고촌방초원(孤村芳草遠) 사일행화비(斜日杏花飛)'라는 대목이다. '물결은 찰랑거리고 버드나무는 하늘거리네/ 외딴 마을의 풀꽃은 아득한데, 해는 기울고 살구 꽃잎 날리네'라는 뜻이다.

정권 교체기임을 고려해도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은 한겨울이다. 그 중심축에 있는 현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은 멋모르고 부르는 봄 노래가 얼마나 섣부른 짓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장과 총리 후보자에 대한 일과 특별사면은 더 섣불렀다. 개인이 섣불리 한 일은 혼자 책임지고 추스르면 될 일이지만, 대통령이 한 섣부른 일은 온 국민이 맷집으로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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