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1부-조선시대 의료 <6>전염병 귀신을 위로하는 여제

"전염병 물렀거라" 1년에 3번 외로운 귀신 달래

조선시대 전염병은 사람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앙이었다. 보편적 의료 혜택이 없던 시절 병을 치료하기 위한 병굿은 그나마 사는 형편이 나은 백성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조선시대 전염병은 사람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앙이었다. 보편적 의료 혜택이 없던 시절 병을 치료하기 위한 병굿은 그나마 사는 형편이 나은 백성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조선은 평상시 지방 행정단위별로 의학교수, 의생, 심약 등을 두어 공공의료를 맡긴 한편 전염병이 돌거나 위급사태가 발생하면 중앙의 의원을 파견하고 질병을 다루는 방책을 약재와 함께 내려 보내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적 적극적 시책과 함께 소극적 질병 구제책인 '여제'도 있었다. 여제는 불운하게 죽었거나 제사 지낼 후손이 없어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알려진 여귀를 위로하는 제사다. 여귀는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제사 지내줄 후손조차 없어서 지극히 외로운 존재인 동시에 역병을 일으키는 우악스럽고 사나운 귀신이었다.

◆명나라에서 유래한 여제

기원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왕이 지내야 할 일곱 가지 제사 중에 '태려'가 있었다. 옛날 제왕 중에 후손 없이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전래했다.

태종 1년(1401년) 1월 14일 정2품 참찬문하부사 권근은 "우리의 조례와 제례가 모두 명나라 법을 따르고 있는데, 오직 여제 한 가지만이 거행되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하거나 분한을 품어서 마음속에 맺혀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겠습니까. 이런 원한이 쌓여 전염병이 생기고, 화평한 기운을 해쳐서 변괴를 가져옵니다"라며 여제 지낼 것을 고했다.

조선시대 전염병이 발생하면 전국에 제단을 설치해 수륙재(水陸齋: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굶어죽은 귀신을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 의식)나 여제를 지냈다. 건국 초기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식 제례인 수륙재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교를 보급하기 위해 차츰 수륙재를 없애고 여제를 지냈다.

문종 1년(1451년) 9월 19일 수륙재 행사를 반대하는 사헌부의 상소문이 올라온다. "황해도 백성들이 역질로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는 장마와 가뭄의 이변으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긴 것인데, 다시 무슨 신(神)이 있어 기도로써 이를 모면하겠습니까? 만약 제사 없는 귀신이 있다면 봄 가을로 매양 여제를 지내는데, 하필 수륙재를 해야겠습니까? 국가에서 불교 의식으로 백성의 병을 구한다면 민심이 더욱 현혹되고, 불법이 더욱 성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이를 반대한다. 문종은 "질병을 구하는 데 유익함이 있을까 해서 지내는 것이다. 절대 폐할 수 없으니 다시 청하지 말라"고 했다.

◆귀신을 달래 전염병 막자

그러나 여제는 점차 상설화하고, 정기적인 관행제(여제)와 임시로 지내는 별려제로 나뉜다. 여제일은 조선 전기부터 매년 세 번 지냈다. 청명, 7월 15일, 10월 1일에 시행하게 돼 있었다. 먼저 산천과 성황에 제사를 알리고, 사흘 뒤에 여제단에 근시(近侍: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를 보내 여제를 행했다.

별려제는 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에 임시로 행했다. 돌림병이 생기면 임시로 귀신 섬기기에 좋은 날을 택해 제를 올렸다. 그러나 전염병이 극심할 경우에는 별도로 날짜를 잡지 않고 곧바로 여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익의 '성호사설' 중에 여제 축문이 남아있다. '외로운 혼이 의탁할 곳이 없고 제사도 받아먹지 못하니, 죽은 혼이 흩어지지 않고 맺혀서 요망한 짓을 한다. 뭇 귀신을 불러모아 맑은 술과 음식으로 권해 드리니, 여역과 재앙으로써 사람의 화기를 해치지 말라'.

서울은 여제는 동교(東郊:동대문 근처)와 북교(北郊:창의문(북문) 근처)에서 성황신(城隍神)을 받들어 행했다. 지방에선 질병이 극심한 곳에 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다. 인조 23년(1645년) 2월 2일 실록에 보면, 전라도에 질병이 만연해 도내에 청결한 곳이 없다고 해서 지리산'금정산'남해당에서 여제를 지내기도 했다.

각 도에서는 도사'수령 중에 차출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중앙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여제를 지낼 때엔 예조 관원이 향'촉'제문 등을 준비해 지방에 행차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마지막 여제는 1902년

여제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남아있다. 세종 20년(1438년) 3월 2일 황해도에 악질이 돌아 고을마다 여제를 지냈다. 당시 제문에는 '백성들이 불행해 한 지역이 죄다 질병을 만났도다. 점점 서로 전염이 돼 퍼져 나가는 형세를 막을 수 없으니, 슬프다. 생령들이 목숨을 잃으니 마을과 들이 모두 쓸쓸하도다. 이는 반드시 원혼들이 있어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요망하고 악한 귀신의 재앙이 된 것이니, 맑은 술을 드리고 밝게 고하나니, 너희 귀신들도 거의 감응하리'라고 했다.

선조 26년(1593년) 12월 11일 비변사에서 서울에 쌓인 시체를 처리할 방법을 건의했다. "겨울 추위로 굶주려 얼어 죽은 사망자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시체들을 큰 시냇가 등처에 쌓아놓아 곳곳에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빈집 외진 곳에도 쌓아놓았기 때문에 날씨가 풀리면 악취가 성에 가득하고, 역질을 발생시킬 것이 틀림없습니다. 굳게 얼어 있을 때 성 밖 10여 리 정도에 있는 양지바른 산록에 하나하나 실어내다가 구덩이를 파고 묻은 다음 여제를 지내듯이 한 그릇 밥과 한 병 술로 제사를 지내 굶주린 넋을 위로한다면 도성 안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따랐다.

현종 3년(1662년) 2월 22일 임금이 신하들과 만난 자리에서 "양남(兩南)에 전염병이 날로 치성해지고 있으니, 영남도 호남에서 했던 것처럼 중앙관리를 파견해 여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명했다. 영조 25년(1749년) 12월 4일 임금이 대신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까운 신하들을 각 도에 보내 여제를 베풀 것을 명했다. 이때 전염병이 서쪽에서부터 일어나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조선 곳곳에 만연해 민간 사망자가 거의 50만에서 60만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명이 내려졌다.

이처럼 조선 후기 전쟁과 잦은 전염병 탓에 여제는 더욱 성행했다. 특히 가뭄과 전염병이 극심했던 현종'숙종 시절 왜란과 호란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곳과 시체를 매장한 곳을 중심으로 별려제가 자주 거행됐다. 여제는 고종 대까지 이어져 1895년 갑오경장 후에도 있었다. 고종 39년(1902년)에도 장마 끝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자 여제가 치러졌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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