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1부> 새로운 출발 ⑦(하)

때론 함께, 때론 남처럼…원수 같은 배우자도 없는 것보다 낫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는 할 이야기가 없다. 자녀 양육이나 자녀 결혼이라는 공통의 목표나 과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체적 노화로 두뇌의 유연성은 떨어지고 감정 컨트롤이 어려워진다. 당연히 자기 고집이 세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잔소리마저 심해진다.

늙음의 현상들이다. 노화 과정 자체가 행복한 부부 되기를 방해하는 조건들이다. 그래서 오늘도 '칼로 물 베기'가 아닌 '말로 살 베기'를 하면서 황혼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랴. 나이 들수록 서로에게 더 없이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인 것을. '원수 같은 배우자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익숙하다 보니 가장 편한 것이 배우자요, 마지막까지 함께할 사람 역시 배우자다.

김향숙 대구가정법원 조정위원은 "30년 이상 오랜 세월을 같이했기에 너무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바뀌려는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고 강조한다. 노후의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는 '때론 함께, 때론 남처럼'이라고 말한다.

◆친구처럼 살아요

중소기업 부장으로 퇴직한 이상준(62) 씨. 그는 노후의 권력이 부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요즈음 요리를 배우고 있다. 혼자 밥을 해결하고 가족을 위해 가끔씩 요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아내로부터 김치찌개나 두부찌개 나물 무침 등 간단한 것을 배우면서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둘만의 이야깃거리가 많아졌다. 가끔 이 씨는 아내가 늦게 오면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린다. 밥 해놓고 아내를 기다리면서 젊은 시절 남편을 기다리며 늦게 온다고 짜증 부린 아내의 마음이 살짝 이해되기도 한다고 했다.

박준민(58) 씨. 그는 집 근처 뷔페에 갔다 과식하는 아내를 타박했다가 아내로부터 "남이 해주는 밥은 무엇이든지 맛있다"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그 후부터 주말에는 밥 당번을 자처한다. 거창한 요리는 아니지만 아침은 아내가 좋아하는 샐러드와 빵을 준비한다. 점심과 저녁은 인스턴트 카레나 미역국, 짜장 등을 준비하거나 가끔씩 외식도 한다. 인스턴트 카레지만 부엌으로 들어오면서 맛있는 냄새라며 행복해하는 아내를 보며 박 씨는 "이런 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뭐 별거 있습니까. 같이 늙어가면서 서로 측은하게 생각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좋으면 나도 좋은 것이지요."

◆연인처럼 즐겨요

잉꼬부부로 소문난 방준영(61) 씨 부부. 이들은 일주일에 3일 스포츠댄스를 함께 한다. 방 씨는 처음 아내가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안 가겠다고 우겼지만 아내를 이기지 못해 따라갔다. 막상 해보니 운동량도 많고 무엇보다 아내와 대화할 수 있는 '거리'가 생겨 좋았다. 다른 부부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집에 오면 음악에 맞춰 자이브를 추며 복습한다. 한 시간쯤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킨십도 돼 신혼 같은 기분이 살짝 들기도 한단다. 함께 춤을 배운 지 1년. 이들 부부의 목표는 3년 뒤 크루즈여행 때 외국인들 앞에서 자이브를 멋지게 추는 것이다.

은퇴한 교수 이구철(66) 씨 부부는 자전거에 푹 빠져 있다. 은퇴 후 이들 부부도 여느 부부처럼 어려움을 겪었다. 새로운 상황에 불편해하고 불만족스러웠으나 이 씨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대생활을 새로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수 해결하고 스스로 모든 걸 한다는 자세를 보이니 날카롭던 아내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들 부부가 연인처럼 지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전거 타기였다. 둘 다 잘할 수 있는 자전거 타기를 시작하면서 어려움이 해결됐다. 올해부터는 자전거로 즐기는 해외여행을 꿈꾸고 있다. 이 씨는 "우리 앞에 얼마만큼 시간이 남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가고 혼자 남아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더 잘해줘야겠다는 마음뿐입니다."

◆때론 남처럼 살아요

김익환(62) 씨 부부. 그들은 아침 일찍 집 앞 동네공원에서 1시간 산책을 한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야채와 과일 빵 등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좋은 영화가 있으면 동네 영화관에서 조조할인 영화를 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서로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아내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하고 싶은 것을 배우고 김 씨는 혼자 방에서 책을 읽거나 클래식 음악을 즐긴다.

활동적인 아내와 조용한 성격의 남편이 서로 다른 취미나 생활을 인정해 주면서 지내는 경우다.

유이화(59) 씨 부부는 1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동안 자는 시간이 맞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아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이젠 서로 편한 쪽으로 하자는 데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자는 버릇이 있는 자신과 달리 일찍 잠자는 아내와 서로 사이클이 맞지 않아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유 씨는 밤에 좋아하는 영화를 마음껏 보거나 책과 함께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꼭 하루종일 함께 해야만 잉꼬부부입니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봐요. 각자 서로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민수 계명대 종교학과 상담학교수는 "은퇴를 하고 나서 긴 시간을 함께 보내려면 남녀의 심리적인 차이를 알아야 한다. 남자는 단순해서 복잡하게 설명하질 못하고 여성은 길게 말로 설명해야지만 이야기가 된 걸로 안다"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강난미 대구 중구 노인상담소 소장은 "노후의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 관계는 친구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친구 같은 부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반드시 둘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때론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행복한 부부의 가장 큰 덕목은 대화라고 말한다. 대화는 어느 날 '지금부터 대화 시작'이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배우자나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태도와 가족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화가 이도현

◆부부간의 대화를 가로막는 10가지 유형

1. 대화 회피형:배우자가 이야기를 하려는데 회피하려는 유형

2. 마음 파악형: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유형

3. 사소한 일로 괴롭히는 형:불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고 배우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유형

4. 애정만을 주장하는 형:우리가 정말 사랑한다면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유형

5. 죄의식을 일으키는 형:자기가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 대신 상대방에게 죄의식을 던져주는 유형

6. 덫을 놓는 형:솔직히 말하라고 한 후 배우자가 솔직히 말하면 화를 내는 유형

7. 보따리에 쌓는 형:화를 표현하지 않고 차곡차곡 보따리에 넣어두었다가 한꺼번에 마구 퍼붓는 유형

8. 농담형:심각한 이야기를 피하고 농담으로 되받는 유형

9. 비위만 맞추는 형:무조건 배우자를 기쁘게 해주려고 드는 유형

10. 옛 규칙 고집형:시간과 상황이 바뀌어도 상대가 과거에 했던 역할만을 고집하는 유형

자료:삼성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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