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이 꼬였다. 예천읍에서 용문면 금당실마을로, 다시 돌아와 지보면에 들렀다 회룡포마을을 찾아가고, 문경시 점촌동으로 넘어가는 코스. 이틀 동안 시내버스를 갈아탄 횟수만 여덟 번이다.
전날 해가 저물어 놓쳤던 용문면 병암정과 금당실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예천읍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버스정류장은 중앙슈퍼마켓 앞 정류장과 국민은행 앞 정류장이다. 중앙슈퍼 앞에는 예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상리면과 하리면, 용문면, 감천면, 영주시 풍기읍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선다. 예천읍을 중심으로 남동쪽 지역이다. 지보면과 풍양면, 용궁면, 개포면, 문경시 점촌동 등 예천읍에서 북동쪽 방면은 주로 국민은행 앞에서 탄다.
◆촌로가 장사꾼을 어떻게 이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날은 예천 5일장이었다. 예천 장은 매월 끝자리 2일, 7일에 열린다. 오전 일찍부터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벌어진다. 파는 이가 농민이고, 사는 이가 장사꾼이다. 도매시장인 셈이다. 촌로가 각종 잡곡이나 곶감 등이 든 자루를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장사꾼들이 낚아챈다. 물건 주인이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보따리를 휙 낚아채 풀어놓고 흥정을 시작하는 식이다. 장사꾼들은 노인들이 직접 가져온 농작물을 사들여 장터에 내다 판다. 영문도 모르고 보따리가 열린 촌로는 이미 정신이 없다.
겨울이라 콩이나 서리태, 깨, 곶감 등 늦가을에 수확한 농산물이 대부분이었다. 한 장사꾼이 할머니가 이고 온 자루 끈을 풀고 들여다본 뒤 흥정을 시작했다.
"콩 한 말인데 2만원 줘요." "에이, 1만5천원밖에 안 돼요." 장사꾼의 제안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할머니는 대꾸도 없이 자루 주둥이를 다시 싸맸다. "딴 데 가도 더 못 받아요!" 콩을 머리에 인 할머니는 소리소리 지르는 장사꾼을 뒤로한 채 말없이 자리를 떴다. 곶감 몇 박스를 실은 승합차가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노부부가 곶감 너덧 박스를 내린다. "한 접 되나? 1만5천원 줄게요." "에이, 안 돼! 2만원 줘요." "우리도 1만5천원에 사서 1만6천원에 팔아야 돼요. 남는 것도 없어요." "그래도 안 돼. 더 줘요."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지만 순진한 촌로가 장사꾼을 어찌 이기랴. 곶감을 넘긴 할아버지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때 아까 말없이 콩 자루를 들고 떠난 할머니가 다시 돌아온다. 이번에는 별말 없이 장사꾼이 쳐주는 값대로 받는다. 다른 장사꾼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병암정과 금당실마을
오전 9시 30분 용문면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병암정까지는 15분이면 넉넉하다. 요금은 1천원, 하금정류장에서 내려 성현리'덕신리 방향으로 300m가량 걸어 들어가면 깎아지른 바위 위에 올라앉은 병암정이 보인다.
정자에서 내려와 농로를 따라 20여 분을 걸어 성현교를 건너면 금당실 마을이다. 예부터 마을에 금광이 있었다고 해 '금당실'로 불린다. 마을 안 용문초등학교에서 용문면사무소를 지나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초가와 기와집들이 나타난다. 함양 박씨 입향조를 모신 추원재를 비롯해 반송재, 사괴당, 구한말의 세도가 이유인의 99칸 고택 터 등이 있다. 2006년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되면서 고택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마을 안에는 초가집 형태를 한 민박집들도 꽤 많다. 마을 한복판에는 길게 띠처럼 이어지는 방풍림인 금당실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이 있다. 원래 2㎞가 넘는 솔숲이었지만 지금은 800m만 남아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소나무를 베 러시아가 요구하는 배상금을 갚았다고 한다.
◆귀농, 막연한 희망은 버려라
금당실마을에서 예천읍까지는 40분~1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오간다. 낮 12시 20분 버스를 타고 예천읍으로 돌아갔다. 지보면 지보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신선채소단지를 만든 귀농인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30분 '예천-점촌(풍양, 삼강)' 버스를 타고 지보면에 도착했다. 요금은 1천500원. 지보리로 가려면 다시 안동 76번으로 갈아타야 한다. 오후 2시에 출발하는 76번 버스를 타고 지보리 입구에서 내린 뒤 2㎞를 걸어 들어갔다.
2004년 귀농한 윤훈식(50) 씨는 이곳에 1만6천500㎡ 규모의 수막(水幕) 재배 시설하우스를 설치해 상추를 재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예천군의 지원을 받아 1만8천㎡ 규모의 신선채소단지를 조성하고 마을 농가에 기술을 지원했다. 준고랭지인 상리면 도촌리에도 6천600㎡에 중대형 하우스 6동을 짓고 쌈채소를 재배 중이다. 윤 씨는 상리면에서 출하를 앞둔 쌈채소 포장작업에 한창이었다. 지보면에서 상리면까지는 승용차로도 50여 분이 걸리는 거리다. 그는 채소 재배뿐만 아니라 유통까지 도맡아 한다. 귀농하기 전 식자재 유통업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린 것이다.
귀농 8년차인 그는 올해 15억~2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농사가 녹록했던 건 아니었다. 시설하우스 재배를 위해 전문가를 초빙해 연봉 6천만원을 주며 농사를 맡겼지만 윤 씨의 기대와는 어긋났다. "너무 쉽게 본 거죠. 농사는 자식을 키우듯이 해야 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경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5년여간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자괴감이 컸어요. 아이가 학교 가는 데 줄 차비조차 없었으니까요. 신용불량으로 다른 곳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요. 정말 죽으려고까지 했는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안 해보고 끝나면 너무 비참하니까."
윤 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추 재배법을 연구하고 전국의 채소재배단지를 찾아다녔다. 결국 3년 전 상추가 수익을 내면서 기사회생했다.
"귀농하기 1년 전부터는 농사지을 곳과 농사 품목을 결정하고 재배법을 익혀야 합니다. 또 원하는 소득이 얼마인지를 확실히 정해서 투자를 해야 돼요." 윤 씨는 "귀농지를 결정한 뒤에 그 지역의 선도 농가를 찾아가 노하우를 배우고 인간관계를 쌓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마을 주민들의 텃세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회룡포마을을 바라보며
지보면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회룡포마을에 가기로 했다.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 갈아타야 한다. 오전 11시 30분 예천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개포면 경진삼거리에서 내린 뒤 1시간을 기다려 용궁면 방면 버스를 탔다. 회룡포마을 입구인 대은2리 정류장까지는 25분가량 걸린다. 회룡포마을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 3차례밖에 없다. 예천읍 출발은 오전 8시 45분밖에 없고, 용궁면에서는 오후 2시 20분과 오후 4시 20분 출발 버스만 들어간다. 국도를 따라 2.5㎞를 걷는데 눈이 쌓인 도로변을 걷는 게 불안불안하다. 40여 분을 걸어가면 회룡포 주차장이다.
회룡포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물돌이마을이다. 주둥이를 묶은 풍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회룡포의 풍경을 보려면 회룡포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가려면 '회룡포전망대 등산로'에서 시작해 전망대에 오른 뒤 산에서 내려와 2개의 뿅뿅다리를 건너면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회룡포로 내려오지 않고 비룡산을 넘어 비룡교를 건너면 삼강주막까지도 걸어갈 수 있다.
장안사까지 1.8㎞는 야트막한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제법 숨이 차오를 만한 오르막에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오고 다시 숨 가쁜 오르막이 잠시 이어지는 식이다. 소나무 숲은 날 선 겨울바람을 이기고 여전히 초록빛이다. 사방은 고요하고, 가쁜 숨소리와 바람 소리만 귓전으로 파고든다. 장안사에서 회룡전망대까지 400m가량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전망대에서는 내성천 물길을 따라 하얗게 눈이 쌓인 모래톱이 휘감아 도는 회룡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아래쪽 임도를 따라 20여 분간 내려가면 내성천을 사이에 두고 회룡포마을을 마주한다. 새로 놓인 뿅뿅다리를 건너면 마을 안으로 곧장 이어진다. 회룡포마을 안에는 캠핑장이 조성돼 있고, 민박이나 식당도 간간이 눈에 띈다. 마을을 벗어나 계속 걸으면 '원조' 뿅뿅다리가 나타난다.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강물은 쩡, 쩡 소리를 내며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 4시 20분 용궁면을 출발하는 예천읍 방면 버스가 오후 4시 35분에 도착했다. 5분가량 타고 대은2리 입구 앞 삼거리에서 내린 뒤 30여 분을 기다렸다. 문경시 점촌까지 가는 버스다. 용궁면을 지나 문경시 점촌동 종합버스터미널까지 25분 정도 걸렸다. 이제 문경이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