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슭에 자리 잡은 초막은 밤이면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기운조차 막지 못했다. 그나마 거동할 수 있는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땔감을 구해 불을 피웠지만 곁 불을 쬘 수 있는 사람도 한정돼 있었다. 피병소에 모인(사실상 갇힌 것이지만)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시체들이 들것에 실려 밖으로 옮겨졌다.
◆피병소를 탈출하다
개울가에 쌓여 있던 시쳇더미로 옮겨질지, 따로 시체를 묻어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역병에 걸려 죽었는지, 제대로 못 먹어 허약해 죽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다 보니 심신이 놀라 죽었는지, 그조차도 알 길이 없었다. 며칠마다 한 무리 사람들이 쫓기듯이 초막으로 들어왔고, 개중에는 분명히 갑수나 큰아들처럼 멀쩡한 사람도 끼어 있었다.
군졸들이 초막 입구에 끼닛거리를 갖다두는 날보다 병자랍시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부려놓는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초막 사람들 숫자는 늘지 않았다. 들어오는 사람만큼, 아니 그보다 많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조만간 초막이 없어진다는 것. 결국, 다 죽어나갈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게 뭐땀시 씰데없는 짓을 해쌌고 그랴?" 한낮에 군졸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장자골 최 서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자기는 멀쩡하다며, 가족들을 찾아야 한다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며 군졸들에게 항의했다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때리기를 멈춘 것도 최 서방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괜스레 죽어버리면 시체 옮기기가 귀찮아서였다.
"이대로 뒤질 순 없제. 무신 수라도 써야겠어." 갑수가 처음 오던 날 이것저것 물어대던 눈매 무서운 남자였다. 그날 밤 초막에서 그나마 건장하다는 남정네 댓 명이 몰래 모였다. 탈출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두고 도망칠 수 없다는 사람, 그렇다면 같이 다 죽자는 말이냐는 사람, 군졸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사람도 있었다.
눈매 무서운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밤, 내는 갈끼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그라." 모인 사람들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겠다는 뜻인지,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자리를 파하면서 갑수는 그 사내의 소맷자락을 끌었다. "내도 갈랍니다. 큰아들이 있소. 같이 갈랍니다." 사내는 표정이 없었다.
초막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높은 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방에 군졸들이 쫙 깔린 것도 아니었다.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좌절감이 초막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뒤쪽 산기슭을 기어올라 이마에 구슬땀이 맺힐 때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내쳐 달음질쳤다. 일행은 모두 일곱 명. 모두 남자들이었다.
◆돌팔이를 만나다
초막을 탈출한 일행들과 헤어진 지도 벌써 닷새가 흘렀다. 갑수와 큰아들을 뺀 나머지는 모두 함께 움직였다. 전라도 쪽으로 간다고도 했다가 감영이 있는 대구로 간다는 말도 했다. 아예 깊은 산 속으로 도망치자는 말도 있었다.
갑수는 내키지 않았다. 아내와 두 아이의 행방도 모르는데 멀리 떠날 수는 없었다. 다시 군졸들에게 붙잡혀 피병소로 끌려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근처에 남아있어야 했다. 어떻게든 떨어진 식솔들의 행방을 수소문해야 했다.
지금껏 역병을 피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에선 군졸들이 지킬까 봐 무서웠고, 인기척조차 없는 마을에선 역병의 기운이 남아있을까 무서웠다. 찬 기운을 피해 산모퉁이 서낭당에 등을 누인 어느 날이었다.
큰아들 기색이 이상했다. 온종일 숨을 쌕쌕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던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어데가 아프노?" 아픈 곳을 안다고 한들 손 쓸 방법은 없었다. 큰아들의 오른쪽 바지춤을 끌어올리자 퉁퉁 부은 다리가 드러났다. 허벅지부터 장딴지까지 잔뜩 부어 있었다. "우째된 일이고?" 초막을 탈출하던 날, 미끄러지면서 다친 것이라고 했다.
벌써 열흘 가까이 상처가 곪은 것이다. 지금껏 걸어다닌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제 아비 걱정할까 봐 말 한마디 못하고 끙끙댔을 아들을 생각하니 뜨거운 것이 목젖까지 치밀었다. 그때였다. "누구 있는교?" 서낭당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누군가 찾아든 것이었다. "하룻밤 같이 지내입시더." 괴나리봇짐을 내려놓는 나그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큰아들의 다리를 본 나그네는 대뜸 "물 좀 끓여 오이소. 가만두면 큰 일 납니데이." 그러더니 봇짐에서 뭔가 끄집어내 바닥에 풀어놓았다. 장침이었다. "의원이십니까?" 나그네는 우선 치료부터 하고 이야기를 더 하자고 했다.
물을 끓이던 갑수는 흠칫 놀랐다. 나그네가 작고 날카로운 칼을 꺼내 아들의 다리를 찢으려 했다. "뭐 하는 짓인교?" 나그네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팔을 내젓고는 끓는 물에 칼을 집어넣었다가 빼서는 곧바로 상처를 찢었다.
가래처럼 누런 고름이 꿀럭꿀럭 흘러나왔다. 아들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나그네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얼추 한 종지쯤 되는 고름을 짜낸 듯했다. 뭔지 모를 약재를 상처에 바른 뒤 흰 천으로 몇 겹을 둘러 감았다. "할 수 있는 만큼 했은께 인자 하늘에 맡깁시더. 살아도 죽어도 하늘 뜻인께."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나그네에게 갑수가 물었다. 어디서 온 누구냐고. "돌팔이라 카대예. 떠돌아댕기민서 기예를 판다꼬. 한 때 의술도 좀 배았는데, 세상이 이 지경으로 돌아가이 가만 있을 수가 있어야지예." 몇 마디 더 나누던 나그네는 이내 코를 골았다. 갑수도 눈을 감았다. 이튿날 아침, 큰아들은 깨어났고 나그네는 이미 사라졌다.
◆도적떼에 들어가다 그리고…
"저리 성품이 곱아서 우째 세상 살라카는교?" 생전 잔소리를 모르던 아내가 가끔 핀잔을 섞어 하던 말이었다. 동네 일이 갑수 일이었고, 이웃의 걱정거리가 갑수의 걱정이었다. 자식들 모두 아비를 닮아 착하기 그지없었다.
새벽녘 꿈에서 깬 갑수는 멍한 듯 사방을 둘러봤다. 여섯 식구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캄캄한 토굴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생경스러웠다. 아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성품 고운 갑수는 도적 무리에 합류했다.
곁에 누워 있던 큰아들이 기척에 깬 듯 "편찮으시예? 와 벌써 일어나셨어예?"라며 걱정스레 물었다. 도적 무리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었다. 먹고살자니 가진 놈들 곡식 훔쳐내야 했고, 약재라도 구하려면 빼앗아야 했다. 어느새 무리는 수십 명을 헤아리게 됐고, 우두머리도 생겨났다. 농사짓던 몰락한 양반이라는데, 말하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툭하면 나라를 뒤엎고 없는 놈들도 기 펴고 사는 세상 만들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갑수가 이곳에 흘러든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돼 간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아내와 두 아이 행방을 물었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것인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살아있으리란 희망은 옅어져 갔다.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처럼 여겨졌다.
소문이 돌았다. 관군이 토벌대를 꾸려서 공격해 온다고 했다. 산채를 겸한 토굴은 술렁였다. 제대로 무장한 군사들이 들이닥치면 몰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다. 토굴 앞마당에서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던 그때 걸음이 날랜 파수꾼이 헐레벌떡 뛰어들며 외쳤다. "관군이다~. 산 아래 관군이 몰려왔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갈 곳도 없었다. 우두머리가 외쳤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 차라리 싸우다가 죽자!" 이길 거라고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이랄 것도 없는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누군가의 아비이고 누군가의 아들일 관군들은 역시 누군가의 아비이자 아들인 도적떼를 무자비하게 죽였다.
한 차례 찔리고 베인 사람들 위로 다른 관군이 덮쳐서 다시 찌르고 베기를 반복했다. 갑수는 사방을 바삐 살폈다. 큰아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뒤에 붙어 있으라고 단단히 일렀건만. 사방에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이 골짜기를 채웠다. "아부지! 피하이소!"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려는데 뜨거운 무언가가 등을 찔렀다. 고통으로 눈이 뒤집히는 순간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는 큰아들이 보였다. 어찌 된 일일까? 손을 뻗어 아들을 잡으려는 갑수의 마음이 일순간 편해졌다.
'그려. 이제 우리 식구들 다 만나야제. 지랄 같은 이 세상 그만 살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야제. 인자 우리 배도 곯지 말고, 아프지도 말자. 우리 마누라 냉잇국이 기가 맥힌데…. 다 같이 둘러앉아 흰 쌀밥 묵어보자.'
소나무골 김씨네 맏이로 태어나 착한 아내를 얻어 아들 딸 두고 한평생 행복하리라 믿었던 김갑수. 마흔도 채 안 되는 짧은 삶을 마감했다. 굶어 죽고, 병 걸려 죽고, 맞아 죽고, 창칼에 찔려 죽은 이가 100만 명을 헤아리던 그때에.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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