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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산책]'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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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자전거로 20리 길을 통학했지만 3학년 때부터는 읍내에서 자취했다. 시골 촌뜨기에게 읍내에서의 '도시생활'은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나왔고, 가로등이 있어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았다. 처음 먹어보는 퍼모스트 아이스크림과 짜장면 맛은 정신을 못 차리게 했으며, 세련된 도시형 미인이었던 자췻집 딸에게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자췻집 딸은 동갑이었지만 벌써 여고 2학년이었다. 나는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그녀는 일곱 살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발육이 늦어 작았던 제 키와 비교하면, 그녀는 이미 160㎝가 넘는 큰 키에 몹시 성숙했다. 몸에 딱 붙게 줄여 입은 교련복에 가방을 들고 등교를 하는 모습이나,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커다란 눈망울에 백옥같이 흰 살결, 티 하나 없는 맑은 얼굴까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 없었다.

누나 같았지, 또래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는 말을 놓았고 전 깍듯이 말을 높였다. 그녀도 동생(?)처럼 대했다. 성격도 활달했다. 수돗가에서 빨래할 때면, 방문을 열고 빨랫거리를 내달라고 했다. 우물쭈물하면 방에 들어와 모아둔 빨랫거리를 들고나갔다. 오래 입은 팬티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문틈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가끔 빨랫줄에 그녀의 옷과 내 옷이 같이 나부끼고 있을 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해가 끝나갈 무렵 연합고사를 치르고 다음 해 봄에 대구로 왔다. 스물한 살 되던 해인가 바람결에 그녀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를 만나게 됐다.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그녀의 아버지 문병에서 였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에서 '아사코'가 그랬듯 그녀도 많이 변해 있었다. 열여섯 살 예쁘던 소녀는 수더분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왜 세월은 유독 여자에게만 더 가혹할까를 생각하게 됐다.

긴 겨울이 물러가고 새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언 땅 아래 엎드려 있던 새싹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나목으로 외롭게 서 있던 나무들은 새 잎을 틔우려 분주하다. 봄은 희망이고 시작의 계절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지만 막상 맞이하고 보면 시큰둥하다. 그 좋았던 스무 살 시절을 좋은 줄 모르고 보냈던 것처럼. 지금은 비록 팍팍한 삶에 함몰되었지만, 모두 한때는 봄날과도 같은 날들이 있었으리라. 몸도 마음도 말랑말랑하던 그 시절 말이다.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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