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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다음 도착할 역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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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여행을 떠나보자. 출발은 대구도시철도 1호선 안심역! '톡', 지폐를 삼킨 기계가 승차권 한 알을 토해낸다. 한 번도 의심한 바 없이 지하의 깊은 구렁 속으로 걸음을 맡긴다. 저 멀리서 바람이 먼저 다가와 잔설이 내린 중년의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불빛 하나,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는 짙은 어둠을 깨워 일으킨다. 대구의 변방, 반야월 안심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누군지도 모를 낯선 사람들이 내 옆에 앉았다가 또 떠나간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오직 자리 하나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앉아 옷깃, 살갗 부딪치면서도 가장 냉랭하게 가는 길이다. 우리네 인생 같아서 서글픈 마음에 살포시 눈을 감고 만다. 닫은 눈꺼풀 위로 도시가 휙휙 나타났다 사라진다.

지하철은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따라 들어오는 고유한 역의 냄새가 있다. 동대구역이다. 중년 남성 한 명이 커다란 짐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들어온다. 출장을 마치고 귀가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 모습이다. 그의 지친 등에 일만의 언어가 지워져 있다. 여윈 등에 생계를 짊어지고 저벅저벅 걷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무거워 보인다.

안내 방송은 낭랑한 목소리로 칠성시장을 알린다. 문이 열리고 생선 비린내도 함께 들어온다. 코를 막고 슬쩍 자리를 옮기는 학생들, 자신들을 위한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사랑을 이들은 알기나 할까? 생선 냄새에 묻어 있는 숭고함에 견주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애처로우리만큼 작다.

열차는 철커덩 철커덩 추임새로 흥을 돋우며 달린다. 일정한 공간 안에 가장 밀도 높은 이곳에서는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소통의 유일한 도구인 듯하다. 무의미한 언어들이 쉼 없이 오고 간다. 손안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들리지 않는 언쟁을 벌이고, 그 어떤 맥락도 없이 세모, 네모의 다양한 그림이 춤을 춘다. 지하철엔 여전히 시끄러운 침묵이 흐른다.

중앙로역에 이르렀다. 우리들의 아픈 기억,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10년이 지났다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는 흔적이 모두의 가슴 속에 서려 있다. 그 상흔을 애써 덮고 싶은 걸까? 이곳에 이르면 여인들의 화장품 향이 유난히 자극적이다.

2호선으로 옮겨 타기 위해서 환승역인 반월당에서 내렸다. 벨트 컨베이어 위에 올려진 제품처럼 아래'위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차피 한 번은 내려야 한다면, 도시에 중독되어 무디어진 감성을 지닌 채 질주하는 삶을 잠시 멈추고, 의미 있는 삶으로의 환승을 위해 여유를 가지고 걸어봄은 어떨까? 비록 새소리 들리는 숲길은 아니지만, 스치는 사람 중에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는 이에게 가벼운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다면 이만한 여행이 또 있을까 싶다.

작업복을 입은 한 남성이 성서산업단지역에서 객차에 오른다. 힘겹게 하루를 보낸 듯,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는다. 눈에 띄는 그의 기름때 묻은 거친 손에서, 입을 열어 토해내는 어떤 웅변보다 더 진정 어린 삶이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누추해 보이지 않는다.

왁자지껄,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온다. 기차는 오만가지 인생 애환을 싣고, 이곳 계명대역까지 달려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젊은 그대'들이다. 무엇인가 만들 수 있다면, 가진 젊음으로 희망을 빚어내길 기대해 본다.

생(生), 곧은 철로처럼 평행을 긋고 속절없이 달려간다. 곧 열차는 어김없이 '다음 역'에 도착할 것이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다음 도착할 역은 문양, 문양~.'

그렇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아파 신음하고, 청년들의 미래는 어둡고 막막하다. 지켜보는 부모들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이 빛 한 줄기 없는 터널처럼 깜깜해서, 살 소망이 다 소멸한 것 같아 보여도 결코 인생 철로를 스스로 이탈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치렁치렁한 어둠은 물러가고 새벽이 밝아오듯 언제나 '다음 역'이 있기 때문이다.

열차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역'을 향해 묵묵히 달릴 뿐이다. 안내 방송이 철커덩 철커덩 소리에 묻혀, 귓가에 신묘하게 들려온다. '다음 도착할 역은 희망, 희망~.'

이상렬/수필가·목사 love20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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