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한 사막을 달리는 도중 갑자기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난다. 수직절벽이다. 길을 가로막은 높이 150m의 암벽 앞에 서니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기를 누른다. 이곳은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고도 시라즈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긴 역사를 가진 유적지이다.
페르시아 제국 황제들의 바위 무덤과 암벽 벽화가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후보로 지정됨으로써 유명해진 곳이다. 이름하여 '나그쉐 로스탐'. 이란어로 나그쉐는 조각이나 회화를 뜻하고 로스탐은 전설 속 한 영웅의 이름이다. 오랜 세월 동안 현지인들은 벽화의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그들은 이란민족의 신화적인 영웅이었던 '로스탐'의 일대기를 새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그쉐 로스탐 즉 로스탐의 벽화로 불려왔다. 그렇게 된 이유는 승전한 모습에 표현된 벽화 중의 한 주인공이 영웅 로스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23년 독일의 고고학자 헤르츠펠트가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비문을 연구하면서 주목을 받았으며 1936년 이후 시카고대학 연구팀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다리우스 1세의 무덤 아래에 있는 사산조 시대의 벽화였다.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이 벽화에는 260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샤푸르 1세가 말을 타고 내려다보고 생포된 로마 황제 발레리안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천하무적이었던 로마군이 패배하고 황제가 무릎을 꿇었으니 샤푸르 1세는 너무나 자랑스러워 사산제국 영토 곳곳에 같은 내용의 벽화를 새기도록 했다. 승자에게는 영광이고 패자에게는 굴욕인 이 장면을 바위에 새겨 대대손손 보여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은 동서양 문명 간 최초의 충돌이라는 그리스와 전쟁을 벌였으나 다리우스 1세 때인 BC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에게 패배했던 굴욕이 있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승리의 모습과 비참한 패배의 모습을 바위산 같은 초대형 광고판에 새겨놓아도 여전히 전쟁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깎아지른 것 같은 바위 절벽 중간에는 페르시아 아키메네스 시대(BC 559~330) 네 황제들의 무덤이 옆으로 나란히 조성돼 있다. 암벽을 향해 오른쪽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 2세의 순서이다. 절벽에 굴을 파서 만든 이 무덤 아래에는 사산제국 시대(AD 226~651)의 황제들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많은 벽화를 새겨놓아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황권을 부여받는 즉위 장면과 로마와의 전쟁 등이 주를 이룬다. 왕의 묘는 십자가형으로 돌을 깨어 파 들어 간 형태이고 중앙에 사각형으로 뚫려 있는 곳이 입구이다. 그 속에 석관이 놓여 있다는데 바위 절벽의 한가운데 지상 50m 정도의 높이이므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위치이다. 당시 그 지역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유해를 신성한 흙속에 둘 수 없으므로 바위굴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세계 3대 종교가 태동하기 이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拜火敎)는 세상의 근본을 땅과 물, 불, 바람의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로 보고,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는 열십자(十)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십자 형태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물의 기둥도 네 개에서 완전한 구도를 가진다고 하며 부근에 있는 왕궁 터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양식과 동일하다. 황제들의 묘를 정면으로 보면 십자가형으로 파 들어간 공간 속에 기하학적 문양의 돋을새김이 있다. 제일 위에는 조로아스트교의 상징인 아후라 마즈다의 상과 왕의 모습, 그 아래는 대좌를 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상하관계를 알 수 있다. 처음 이 구조물을 만들 때 바위산 정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작업했거나 흙을 높이 쌓아올린 지지대 위에서 조각을 하면서 점차 아래로 파내려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부근에는 돌로 만든 육면체의 구조물도 보인다.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신전이나 불을 보관했던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황제의 장례식이 치러질 때 제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3천 년의 세월이 흘러 아랫부분은 땅속에 묻혔으나 큰 훼손 없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페르시아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성립한 황제들의 암벽 무덤도 특이하지만 뒤이은 왕들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벽화는 더욱 생동감 있게 역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벽화 중에 전투장면을 보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말 탄 병사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곳 나그쉐 로스탐은 황제의 무덤만이 아니라 다양한 벽화들 속에 그 시대의 문명이 함축되어 있다. 암벽에 나타난 모습은 실크로드의 바람을 타고 멀리 대륙의 동단에 있는 한반도까지 흘러왔을 것이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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