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직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 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했다. 물론 고종과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있었지만,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당시 만주와 중국 상해, 국내에는 성격을 달리하는 조직들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통합해 발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행정수반에 이승만이 추대됐고,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등 6부 총장이 임명된 뒤 1919년 오늘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어렵게 발족했음에도 조선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조선 침략 원흉인 일본인들을 암살하는 등 큰 공헌을 했지만 좌'우파의 대결이 극심했던 데다 독립 방식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갈등이 심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정통성의 출발을 상해 임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일부에선 임정의 정통성에 시비를 걸고 있기도 하다. 임시 정부 초대 수반이었던 이승만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되는 영광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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