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53) 풍월당 대표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클래식 마니아 사이에 '성지'(聖地)처럼 여겨지는 풍월당을 10년째 이끌고 있는가 하면 오페라 평론가, 예술 칼럼니스트로서 10여 권의 저서를 낼 만큼 저술'강의활동도 활발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까지 정신과 전문의로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더욱 정체(?)가 궁금해지기 마련. 하지만 정작 그는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문화인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그의 '화려한 인생'을 살짝 들여다봤다.
◆취미가 직업으로
이달 8일 찾아간 풍월당(서울 강남구 신사동)은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 로데오역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국내 최대의 클래식 음반 전문점이란 선입견 탓에 5층 건물 한쪽에 자그마하게 걸린 간판을 차마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션 메카' 로데오거리에 클래식이라니….
3만여 장의 클래식 음반이 가득한 매장 내 카페 '로젠 카발리에'에서 박 대표와 마주앉았다. 카페 이름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따왔다. 대뜸 클래식과의 인연이 언제 시작됐냐고 묻자 다소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박종호=음악'은 아닙니다. 대신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할 수는 있겠죠.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듣기는 했지만 저에게 음악은 세상을 알게 하는 소재입니다. 훌륭한 음악가 역시 음악을 통해 부조리'정의 등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의 강의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오페라 역시 배경이 된 역사와 함께 전방위 예술적 시각으로 풀어낸다. 현재 대구 한 백화점에서 열리고 있는 특강의 주제도 피아니스트'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에서부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까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과 백만장자 사업가 피에르 베르제의 50년 동성 연애에서부터 '영원한 예술의 원천'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기만 하다.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과 테너 피터 피어스를 보세요.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한 동성애자이지만 영국 왕실에서 귀족 작위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가진 잣대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동전을 던지면 앞이나 뒤가 나오는 경우만 있는 게 아니라 똑바로 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청중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그의 강연 경력은 어느덧 20년을 헤아린다. 지인들에게 재미삼아 설명해주던 게 입소문을 타면서 아예 업(業)이 됐다. 그의 강의를 몇 년째 듣는 고정 팬들도 두텁다. 2007년 풍월당에 예술과 고전을 공부하는 아카데미까지 추가해 '클래식 커뮤니티 센터'를 표방하는 것도 제대로 된 청중을 양성해보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저는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오타쿠'란 일본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골방에서 우물을 파는 행위는 사회에 대한 기여가 전혀 없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예술에 대한 물꼬를 터주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생생한 현장 경험이 강의 밑천
풍월당(www.pungwoldang.kr)은 그의 경력만큼이나 별난 곳이다. 2003년 개점 당시만 해도 주위의 반대가 많았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음악 문화공간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로고는 '음악을 통한 위로의 나무'를 형상화했다. 나뭇가지에는 음표와 하트, 십자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영문 표기 'Pungwoldang'은 나무를 지탱해주는 뿌리의 모양새다.
국내 유일의 클래식 전문 음반'DVD 매장인 이곳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미술관'박물관처럼 큐레이터(curator)가 있다는 것이다. 고객들이 향긋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구매한 음반을 들어보거나 담소를 나누는 공간인 카페도 마련해 놓았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열리는 유명 음악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행팀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경비는 일반 여행상품의 몇 배에 이를 정도로 만만치 않지만 반응이 좋다.
"클래식은 음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가 채 안 됩니다. 대부분 매장이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놓았을 뿐이죠. 대한민국에 괜찮은 전문 매장이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결국 제가 차렸습니다. 수강생들의 수학여행처럼 운영하고 있는 유럽 예술탐방 행사도 상업적 목적이 아니에요. 혹시 대구에서 저 같은 일을 벌이고 싶은 분이 있으면 정말 말리고 싶네요."
그의 강연이 생명력을 갖는 것은 물론 생생한 현장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외에서 관람한 공연만 1천 편이 넘고, 매년 서너 번씩 유럽으로 '음악 방랑'을 떠난다. 지난해 개정 증보판이 나온 베스트셀러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에는 이 같은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93년 이탈리아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을 가본 뒤 여행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소도시에서 주로 열리는 페스티벌을 찾아다니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죠.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엽서와 똑같이 사진 찍기만을 반복하는 여행객들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균형 잡힌 경계인을 꿈꾸며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대중성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역시 클래식의 대중화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했다. 일반인들을 위한 책도 많이 냈지만 '좋은 관객'이 많아지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는 '까도남'답게 클래식을 대하는 청중 수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그너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청중이 늘어나야 음악도 발전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청중은 오페라를 눈으로만 보고는 들었다고 착각합니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지만 우리가 좀 더 심한 편이죠."
그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추진하는 공연장 건립에 대해서도 비판을 잊지 않았다. "하드웨어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에요. 관객의 수준이 낮으면 공연 수준도 더 자극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는 대학 진학 당시 음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했다.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얼핏 겉으로만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너무나 행복한 삶인 것 같지만 그의 속내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음악인은 지성인이 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책만 읽는 겁니다. 제가 책 쓸 때 제일 힘든 게 좋은 글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균형 잡힌 경계인이 되는 것입니다."
글'사진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박종호는='우리 시대의 딜레탕트'(dilettante'아마추어로서 예술을 즐기거나 창작하는 사람)로 꼽히는 그는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지방 강연도 고향인 부산과 대구에서만 하고 있다. 그는 "대구 애호가들은 수업에 굉장히 열성적"이라며 "강좌를 함께 듣겠다며 친구를 데리고 오시는 분도 많고 강의에 대한 피드백도 빠른 편"이라고 평가했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2'3, '불멸의 오페라'Ⅰ'Ⅱ,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 '황홀한 여행' '오페라 에센스 55'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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