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6> 대구의 근대 의학 교육(중

일제 초 대구는 '반쪽 병원' 시대…1933년 드디어 '醫專' 시

1931~1934년 촬영한 대구의학전문학교 강의실 풍경. 실제 환자를 강의실 가운데 두고 진료를 하며 강의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1931~1934년 촬영한 대구의학전문학교 강의실 풍경. 실제 환자를 강의실 가운데 두고 진료를 하며 강의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1923년 9월 2일 사립 대구의학강습소가 문을 연 뒤 성격이 도립으로 바뀌고, 소속도 관립 자혜의원이 아닌 도립 대구의원으로 바뀌면서 의학강습소 규정도 강화됐다. 입학 규정과 교과과정이 의학전문학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바뀌고 시설에 대한 투자도 꾸준히 이뤄졌다. 하지만 아직 의학전문학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평양과 미묘한 경쟁관계에 있던 대구는 유지들과 시민, 학생들이 함께 힘을 모아 의학전문학교 승격을 염원했고, 193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됐다.

◆의학전문학교에 버금가는 대구의학강습소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1926년 3월 13일 발생한 도립 대구의원의 대화재는 의학전문학교로 가는 디딤돌을 마련한 셈이 됐다. 2년 7개월 뒤인 1928년 10월 15일 현재 경북대병원이 위치한 동운정(중구 삼덕동)으로 도립 대구의원이 옮겨가면서 의학전문학교의 필수조건이랄 수 있는 임상실습 병원을 갖추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듬해인 1929년 5월 1일엔 조선총독부 경상북도령 제8호로 '도립 대구의학강습소 규정'이 공포돼 오랜 숙원이던 전문학교에 준하는 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승격됐다. 이름은 예전 그대로 쓰였지만 정규 의학전문학교에 버금가는 의학교육기관으로 승격되는 질적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때 바뀐 규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학자격이다. 정규 의학전문학교만큼 강화된 것. 중학교 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와 이와 동등한 학력의 소유자(즉, 전문학교 입학시험검정에 합격한 자) 등으로 상향됐다.

정원은 150명에서 200명으로 늘었다. 무엇보다 수업시간이 크게 바뀌었다. 신입생부터는 오전 9시부터 매일 7시간 수업을 받았다. 야간제 강습소가 아닌 정규 학교처럼 바뀌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의학교육이 시작된 셈이다.

입학 규정과 교육과정이 강화됐지만 시설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었다. 강습소 별도의 건물을 갖지 못한 채 도립 대구의원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었다. 이때문에 이후 꾸준히 별도 건물을 짓는 과정이 이어졌다. 1929년 교실로 사용할 목조 단층 건물 한 동을 세웠고, 1931년 해부학교실 및 병리학교실용 벽돌 건물과 임상강당용 목조 계단식 건물을 한 동씩 지었다. 그 해 11월 27일엔 대구의학강습소가 세워진 뒤 최초의 학술강연회가 열렸는데, 임상강당 건물의 준공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처럼 강습소 건물이 하나씩 늘어갔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못해서 도립 대구의원의 건물을 빌려 강의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의학교로 지정됐지만 반쪽자리 의사면허

수업은 정규 전문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1'2학년은 기초과학 중심으로, 3'4학년은 분야별 의학 중심으로 매주 30시간 이상 수업을 받았다. 교수진은 도립 대구의원 의관들이 겸했고, 해당과목 전임강사를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전문학교에 버금가는 입학 조건과 교과과정을 마쳐도 졸업생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없었다. 당시 의사가 되려면 조선총독부가 인정한 의과대학'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힘들게 입학해서 어렵게 공부를 마쳐도 총독부가 인정한 의학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립 대구의학강습소 졸업생은 다시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이 때문에 결국 1930년 3월 조선총독부는 대구와 평양의 의학강습소를 '의학교'로 지정해 이후 졸업자에게 무시험으로 의사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이 해 3월 24일 제2회 졸업생 16명부터는 의사시험없이 의사면허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생들의 불만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부여한 의사면허는 조선에서만 통용될 뿐 일본에선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구와 평양에 있는 의학강습소 학생들은 정규 의학전문학교 졸업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무성이 발행하는 의사면허를 받기를 원했다. 조선뿐 아니라 일본, 만주 등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면허증을 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정규 의학전문학교(의전)으로 승격하는 길 외에는 없었다. 주춤했던 의전 승격운동이 대구와 평양에서 다시 불 붙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구지역 유지들과 시민들이 먼저 나서기 시작했다.

1930년 11월 30일 대구부윤(대구시장)이 공직자 전체협의회 자리에서 '대구의전 설립 기성동맹회'를 부활시키고, 적극적인 모금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얼마 뒤 경북도지사도 담화를 통해 '도민의 숙원인 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실현하기로 결심했으며, 평양의학강습소가 훌륭한 교사를 완성한 사실을 거울삼아 대구의학강습소 교사를 신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지역 유지와 시민, 학생이 함께 의전 승격 운동 펼쳐

학생들도 나름대로 승격운동을 펼쳤다. 물론 학생들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는 있었다. 훗날 대구의학전문학교 출신이자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김만달 박사의 증언을 빌려 당시 상황을 짐작하자면 이렇다.

'당시 의학강습소 학생 중 일본인은 한국인의 절반 내지 3분의 1정도였다. 한국인이 의학 공부할 기회가 더 많았던 셈이다. 만약 의전으로 승격되면 학생 비율이 오히려 일본인이 많아지는 쪽으로 역전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오히려 승격 운동에 느긋한 입장을 취하는 한국인 학생도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통용되는 의사면허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달리 승격 운동에 적극 나서는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의전이 되면 학생 모집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학생 비율이 역전되더라도 한국인 학생수가 줄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인정받는 의사면허를 원했기 때문에 적극 나섰다.'

물론 일본인 학생들은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재일본 대구의전 동창회'에서 대구의학강습소 출신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응답자 모두 '의전 승격을 열망했다'거나 '승격 운동에 직접 참여했다'고 답했다.

대구뿐 아니라 평양에서도 의전 승격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두 지역이 연대해서 운동을 펴기도 하고, 공식적인 청원도 제기했지만 조선총독부는 확실한 응답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1933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도 당국은 묵묵부답이자 대구와 평양 의학강습소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생회는 졸업시험 거부를 통보했고, 당황한 학교측은 총독부에 분명한 답을 촉구했다. 결국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의전 승격이 총독부 차원에서 추진중임을 밝혔고, 경상북도와 평안남도는 의전 승격 후 인건비를 추가로 예산에 올려 총독부에 제출했다.

결국 1933년 3월 3일 두 지역 의학강습소를 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안이 각료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전보가 총독부 학무국에 이어 경북도와 평남도 학무국장에게 전달됐다. 바야흐로 대구 의학전문학교 시대가 열린 것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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