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낙화, 첫사랑-김선우(1970~)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제목이 둘, 시가 둘, 두 편의 시가 한 폭에 앉아 서로 조응하고 있다. 얼핏 보면 1은 낙화, 2는 첫사랑이다. 그러나 곰곰 곱씹어보면 1이 첫사랑이고 2가 낙화다.

1에서는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지켜보는 냉가슴 첫사랑이 아릿하다. 먼발치서 곁눈으로 가슴을 앓는 동안 꽃은 지고 사랑은 가슴에서 진다. 낙화의 모습에서 자신의 서툰 첫사랑을 본 것이다.

2에서는 가슴에서만 피고 진 첫사랑을 아프게 되짚는다. 언젠가 다시 꽃이 피고 진다면 그땐 "온몸으로" 따라나서겠다는 참회록이다.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는 것을 사랑으로 알던 자아를 넘어 동반 '추락'을 감행하겠다는 말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절벽에서 낙화인 듯 사뿐 내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결기가 먹먹하다.

1은 낙화와 서툰 첫사랑이고 2는 자신에 대한 첫사랑과 낙화다. 한 폭 그림 속에 꽃이 진다. 난만하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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