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유럽에서 귀족이 가장 많은 나라는 폴란드였다. 귀족민주주의의 전성기로 소위 '황금의 자유'라고 불린 16세기, 폴란드의 귀족은 인구의 약 10%에 달했다. 1831년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1%, 1867년 영국인의 약 3%가 참정권을 가진 특권층인 점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폴란드 귀족들은 '세임'(sejm)이라는 협의체를 만들어 특권을 유지하고 자신들 이득을 지켰다. 세임은 모임'집단이라는 뜻의 고 슬라브어로 현재는 폴란드 국회(하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됐지만 귀족모임이 그 출발이다. 귀족들이 특권 의식으로 뭉치고 국가를 전횡하면서 한때 지도 상에서 폴란드가 없어지는 비극을 초래했다.
세임은 만장일치제 구조였다. 정책 결정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라도 반대하면 그 안은 부결됐다. '리베룸 베토'라는 자유거부권이 근거다. 이 법은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한 합의 도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종종 국정을 마비시켰으며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했다. 귀족들의 특권 의식이 한 나라에 어떤 폐해를 끼쳤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귀족에게는 동등한 권리와 특권이 주어졌는데 국왕도 귀족들이 선출했다. 자유민주정치의 사례라는 평가도 있지만 세임은 귀족의, 귀족에 의한, 귀족을 위한 아성이었다.
달도 차면 기울고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고 했다. 1772년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은 '세 마리 검은 독수리의 동맹'(3국의 문장이 모두 검은 독수리였다)을 맺고 폴란드 영토를 점령했다. 저항하던 폴란드인만 10만 명 넘게 죽었지만 1795년 폴란드 영토는 결국 분할돼 이후 123년 동안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 귀족 때문에 폴란드가 망했다는 논리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폴란드 망국에 귀족이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자기 이해에 골몰하다 강대국의 매수에 넘어간, 폴란드 귀족들이 쓴 오점의 역사다.
어디든 소수의 특권층, 폐쇄적 계층 의식은 존재한다. 인간 사회뿐 아니라 자연계 모든 군집은 필연적으로 계급을 만들고 층위를 가른다. 신분 제도는 없을지 몰라도 신분 의식은 좀체 지우기 힘든 게 현실이다. 헌법에 따라 평등권을 보장받는 현대사회에서도 신분 차별 소위 '갑을 관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라면 상무'나 '장지갑 회장' 사건으로 표출된 고질적인 갑을 관계가 대한민국을 멍들게 하고 있다는 목소리다. 이 두 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돌부리에 불과할 뿐 군림하는 '갑'과 마냥 엎어져야 하는 '을'이 연출하는 갑을의 뿌리 깊은 병폐가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우려다.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79.5%가 자신을 '을'로 인식할 정도로 갑을 문화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갑은 무한정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을은 자신에게 불리해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을사(乙死)조약'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면 사정이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틀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갑을 구조가 아니라 갑을 의식이다. 갑이라고 을을 함부로 대하는 사회, 갑에게 무한정 눈치 볼 수밖에 없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도 지속 가능한 사회도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무원과 민원인, 정부와 지자체, 직장 상사와 부하 등의 관계에서 갑질이 도를 넘은 사회는 분명 비정상이다. 반면 특권 의식 없이 을을 파트너로 대하고, 그런 갑을 존중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을이 많은 사회, 그게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가진 것 없는 딸깍발이 '을'이라도 기 펴고 사는 사회, 박근혜정부가 주창하는 국민행복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아무리 '창조경제'를 부르짖어도 소수가 다수를 누르고 피를 말리는 사회구조로는 어림도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은 분노해서가 아니다. 아파서다. 모든 반응은 원초적이다. 우리 사회가 수직적 문화에서 수평적 문화로 바뀌고 사고의 틀을 빨리 바꾸지 않는다면 가망이 없다.
2차대전 당시 파리에 머물렀던 화가 피카소는 "성실히, 헌신적으로 일하고 양식을 구하며 조용히 친구들을 만나고 자유를 고대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이 독백은 모진 세상을 사는 수많은 을의 독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갑질도 어지간해야 한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런 촌스러운 막말은 이제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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