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과 콘크리트 건물. 어느 곳이나 기어오른다. 무슨 소원이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풍요로운 대지와 안락한 땅을 원하는 게 아니다. 뿌리 내릴 토양이 없어도 언제나 앞으로 위로 행군한다. 두려움이 없고 자신감이 가득하다. 그러나 일단 올라가면 어떤 건물이든 벽이든 그곳과 자연스레 동화해 그윽한 풍경을 만들어 준다.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정과 의리를 지닌 담쟁이. '정과 의리'의 도시 대구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담쟁이가 잿빛의 도심을 녹색으로 바꾼다.
◆대구를 휘감다
대구의 곳곳을 휘감고 있는 담쟁이덩굴들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대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삭막했던 곳들도 담쟁이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심 나들이 명소로 떠올랐다.
가곡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이다. 완연한 봄이 내려앉은 이곳은 노랫말처럼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물론 연주자는 담쟁이다. 담쟁이 덕분에 이름까지 얻은 이곳은 대구에서도 가장 유명한 담쟁이 명소다. 매일 아침 출근 전 이곳을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김진형 씨. 아침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새벽 안개와 함께 연출하는 멋진 모습에 반한단다. 김 씨는 "이곳을 산책하다 보면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가 쓴 '마지막 잎새'가 떠오르면서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고 했다.
대구의 젖줄 신천도 요즘 푸름을 자랑한다. 직장인 김성수 씨는 직장이 자택과 가까워 신천을 따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출퇴근길. 도로변이 온통 녹색으로 물든 모습을 보면서 피곤을 잊는다. 그는 "중구에 있는 직장과 집을 오가다 보면 신천의 아름다운 모습과 신천동로의 벽면과 울타리를 가득 덮은 담쟁이 덕에 마치 시골길을 다니는 기분이다"고 했다.
이 밖에 달구벌대로(연호네거리~담티고개), MBC네거리, 만촌동 메트로팔레스 등도 담쟁이를 구경할 수 있는 명소로 떠올랐다.
도시 미관도 크게 변했다. 그동안 대구는 섬유'자동차 부품'기계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중반까지 회색도시라는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담쟁이가 도심 곳곳에 등장하면서 조금씩 변모했다. 지금껏 대구에 심은 덩굴 식물은 무려 230만 그루나 된다. 이 가운데는 시민들이 직접 심은 것도 있다. 기업체'학교'아파트단지의 벽면과 펜스가 온통 덩굴 식물로 가득하다.
신천'방천둑길 등 도심을 흐르는 강과 신천동로 등 도시고가도로까지 담쟁이가 무성하게 자란다. 담쟁이덩굴'헤데라류'능소화 같은 벽면을 타고 오르는 식물과 울타리를 감고 오르는 식물 등 종류도 다양하다. 사업상 대구와 청도를 자주 오가는 최영수(60) 씨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마자 고가도로의 교각과 벽면이 온통 덩굴 식물로 치장된 것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다.
◆대구의 '아이비리그'
지역 대학에서도 담쟁이를 쉽게 볼 수 있다. 계명대, 대구공업대 등 일부 대학들은 역사만큼이나 울창한 담쟁이들로 '대구판 아이비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아이비(ivy)는 담쟁이를 의미한다.
대구공업대는 담쟁이가 건물은 물론 담벼락 등 학교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 학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정문을 지나 진입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건물의 전면부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1호관이 나온다. 1호관은 1976년 대구공업대(당시 대구공업전문학교)가 개교하면서 가장 먼저 완공된 건물. 건물을 보호하고 환경미화 차원에서 이 학교의 설립자인 이경희 이사장이 지시하여 심어졌단다. 이사장의 각별한 보호(?) 아래 3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면서 학교의 명물이 됐다.
아침마다 이 대학에 나와 산책을 한다는 이숙자(74'대구 남구 대명동) 씨는 "담쟁이덩굴 덕분에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학교 건물들에 심취하게 된다.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다"고 했다.
영화 촬영장소로 각광받는 계명대 성서캠퍼스. 이곳의 담쟁이도 멋쟁이다. 아담스채플에서 스미스관으로 내려오는 조그만 오솔길은 숲 속의 길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담하고 조용하며 산새들의 소리가 들리는 이곳이 캠퍼스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스미스관의 외관은 온통 담쟁이덩굴이 덮고 있다. 건물을 휘감고 올라간 담쟁이의 푸른빛이 붉은색 벽돌에 비쳐 선명하다.
경북대 사대 부설중'고를 휘감고 있는 담쟁이들은 40년이 넘는 중년이다. 화마를 견디고 자란 담쟁이라 이 학교 출신들에게는 더욱 애틋하다. 지난 1972년 2월, 본관 건물에 화재가 났다. 1923년에 지어진 교사는 겨울바람 속 타오르는 화마를 견디지 못해 12개 교실이 몽땅 타버렸다. 붉은 벽돌 건물을 뒤덮고 있었던 담쟁이덩굴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이듬해 봄. 불타 버린 그 자리에서 어린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건물 벽은 다시 무성한 담쟁이 숲을 이루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 출신인 최창윤 삼일회계법인 이사는 "재학시절 선생님들로부터 담쟁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고3 당시 급훈이 '담쟁이처럼 살자'였다. 담쟁이의 강인한 생명력과 낮은 데로 임하지만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담쟁이 같은 인간이 되자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신의 선물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 최근 과학자들이 밝힌 담쟁이 능력의 비밀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담쟁이는 덩굴잎 중량의 약 200만 배에 달하는 힘으로 붙어 있는 놀라운 접착력을 과시한다. 미국 테네시대학의 밍중 장 교수팀에 따르면 노란색 물질을 분비하는 초록 잎 잔뿌리에서 나노미터 크기의 물질이 있고 이 물질이 수소결합을 통해 다른 분자와 결합하고 수백만의 약한 결합이 합쳐져 큰 힘을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그만 담쟁이 잎 하나가 거대한 벽을 넘는 비밀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담쟁이는 콘크리트의 부식을 막아주고, 뜨거운 햇볕의 열기를 막아 수명 또한 연장된다고 한다. 식물학자들에게는 '신의 선물'로 불린다. 식물 생장에 장애가 많은 좁은 공간에서도 잘 자라고 관리비가 저렴하며 녹지율을 높이는 효과가 뛰어나서다. 복사열을 차단해 건물과 도심의 기온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건물의 도로 쪽 벽을 담쟁이덩굴로 덮을 경우 실내온도를 2∼3℃가량 낮출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먼지와 소음을 흡수하는 역할도 한다.
엄원태 대구가톨릭대 조경학과 교수는 "담쟁이는 1년에 평균 1.5m 정도 성장하는 속성식물로서 웬만큼 높은 담장이나 옹벽도 2, 3년 정도 지나면 피복되어 복사열 차단과 소음, 비산먼지 흡수에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 "담쟁이가 콘크리트와 벽돌을 부식시킨다고 잘못 알려진 적이 있다. 그러나 벽면은 덩굴 식물이 덮으면 산성비와 자외선이 차단됨으로써 콘크리트 표면의 균열을 방지하고 침식과 도료 탈색을 예방하는 등 건물의 내구성이 오히려 향상된다"고 했다.
◆담쟁이덩굴 도시 만들자
대구시도 적극적이다. 1999년부터 담쟁이덩굴 도시 만들기에 나서 지난해까지 1천694곳에 211만 그루를 심었다. 대구수목원에서 재배한 담쟁이와 묘목상에서 구입한 담쟁이를 도로변, 학교, 다리 등 각종 구조물의 벽면에 심었다. 1m당 3그루 정도를 심을 수 있으니 거리로 따지면 700㎞ 정도이다. 대구를 동서로 관통하는 달구벌대로(경산시 경계~성서 강창교 23.7㎞)를 열다섯 번 정도 왕복한 셈이다. 특히 신천동로와 앞산순환도로 등 두 곳은 '담쟁이덩굴 녹화 시범도로'로 정했다. 도로에 있는 방음벽'옹벽'다리'난간 등을 담쟁이덩굴로 덮어 녹색 도로로 변신시켰다.
대구시는 이달과 다음 달 동안 3억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중구의 달구벌대로 등 31곳에 13만7천 그루를 심을 예정이다. 또 도시 녹화를 위해 현재 자라는 담쟁이덩굴 외에 사철 잎이 푸른 헤데라(송악)도 심기로 했다.
헤데라는 세계 공기 정화식물 50가지 중 미 항공우주국(NASA)이 선정한 최고의 공기정화 식물로서 콘크리트 벽체에서 내뿜는 프롬알데히드 등의 독소를 제거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대구시는 이 식물이 시민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열섬현상 완화 등 도시 환경개선에 효자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부섭 대구시 환경녹지국장은 "현재 도로변 옹벽과 학교 벽 등 녹화가 필요한 공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삭막한 콘크리트 옹벽과 담장 등에 덩굴 식물을 심어 전 시가지가 푸르고 아름다운 녹색망이 연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