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한국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가수, 선우일선(하)

식민지 민중의 서러움을 애처롭고 유장하게 노래

선우일선은 줄곧 신민요 중심으로만 불렀는데, 이 때문에 폴리돌레코드사는 세간에서 '민요의 왕국'이란 평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취입한 대표적인 신민요곡으로는 '숲 사이 물레방아''영춘부''느리게 타령''청춘도 저요''지경 다지는 노래''가을의 황혼''별한''남포의 추억''무정세월''그리운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우일선의 노래를 가장 대표하는 곡으로는 그녀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조선팔경가'(1936.1)가 아닌가 합니다.

①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②에 석굴암 아침 경은 못 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③에 캠프의 부전고원 여름의 낙원이요/ 평양은 금수강산 청춘의 왕국이라

④에 백두산 천지 가엔 선녀의 꿈이 짙고/ 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경이로다

(후렴)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조선팔경가'(편월 작사'형석기 작곡, 포리도루)는 2박자의 밝고 씩씩한 곡으로 신민요의 고전에 해당되는 명작입니다. 이 작품의 창작 모티브는 석굴암의 아침 경관이 보여주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조선팔경가'를 지은 작곡가 형석기는 1911년에 태어나 20대 초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해방 후에는 민요 편곡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 노래는 1939년 '조선팔경'이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재발매했는데, 첫 발표 후 3년이 지난 세월에도 여전히 대중들의 크나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 시대에 내 나라 내 땅의 아름다움과 그 민족적 긍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노래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찡했겠습니까. 당시 식민지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이 '조선팔경가'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목이 메도록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도 이 노래는 계속 불려졌는데, 이 사실은 참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팔경가'란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되 여덟 군데의 명소를 모조리 북한지역으로만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남한의 것과 다릅니다. 다 같이 남북한이 함께 부르는 곡조이지만 분단은 이렇게 노래에도 스며들어 가사를 남북한 버전으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신민요풍의 가수 선우일선의 노래는 하나같이 중심과 터전을 잃어버린 당시 식민지 민중의 서러움과 슬픔, 청춘의 탄식, 고달픔, 삶의 애환 따위를 너무도 애처롭고도 유장한 가락으로 실실이 풀어갑니다. 선우일선의 음색에는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제 풀에 말라버린 눈물자국이 느껴집니다.

선우일선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고향인 평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에겐 특별히 사상이나 이념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다만 고향의 가족과 친척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선우일선은 해방 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전신인 평양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민요를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늙어서는 민요의 원리와 형성과정에 대하여 열심히 연구하다가 1990년 한 많은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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