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사람'이라는 시집

북인의 영수였던 내암(來庵) 정인홍의 어릴 적 이야기다. 절에서 글을 읽는데 경상도 감사 양희(梁喜)가 밤중에 글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불러 시를 지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내암이 잘 짓지 못한다며 사양했으나 감사는 탑과 소나무를 시제로 운자를 주며 재촉했다.

마지 못해 '작디 작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있으니/ 탑은 높고 솔은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지금은 외로운 솔 낮다 하지 마소/ 솔이 자란 다음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감사가 감탄하며 "후일 반드시 현달하리라. 그러나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왜송은 내암 자신을, 탑은 훗날 자신의 장인이 된 양희를 비유한 것이다. 아이답지 않은 강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시로 내암의 강기가 일찍부터 시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시는 뜻(志)이 표현된 것이다. 생각은 깊고 말은 얕기 때문에 말은 다 드러낼 수 있지만 생각은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모름지기 시가 다 드러난다면 이는 말이나 구호이지 뜻이 아님을 성찰하라는 가르침이다.

근대 인물 112명을 조명한 한국시인협회 공동 시집 '사람'이 말썽이다. 이 시집은 김옥균'김좌진으로부터 이승만'박정희'김대중'이병철'정주영 등 정치인과 재벌, 손기정'나운규'김수근'앙드레김에 이르기까지 각계 인물에 대한 시를 수록했다. 그런데 소속 시인들이 이념적 편향과 객관성 등을 문제 삼아 집행부 사과와 시집 회수를 요구해 파문이 일고 있다.

시 쓰기에 경계는 없지만 특정인을 소재로 했다는 점은 충분히 논란거리다. 작품성을 떠나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들에 대한 찬사나 미화는 시와 시의 역할에 있어 부정적 요소임은 분명하다. 시협은 역사적 평가나 이념이 아니라 문학의 눈으로 사람을 재조명하는 것이 취지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출간기념회에 대통령 참석까지 추진하다 무산된 점을 미뤄볼 때 결코 순수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학에서 정치적'이념적 편향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찬양조의 문학에서 그 생명력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옛말에 '종묘 제사에 쓰는 술잔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가악(嘉樂)은 들에서 연주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시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예를 벗어나면 가치를 잃게 된다. 시인들이 뜬금없이 권력자'재벌 찬가라니 괜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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