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질 듯 잘록한 뒤축, 가느다란 와인글라스의 손잡이를 닮았다. 뾰족하고 위험하게 생겼다. 몹시도 불편하게 생겼고 섣불리 덤볐다가는 그 뾰족한 구두코에 상처를 입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사람 죽이는 킬힐(kill hill)이란 별명까지 생겼다. 키도 차츰 커졌다. 30㎝가 넘는 장신(?)도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오래다. 젊은 여성에서부터 임산부까지….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차라리 옷을 벗을지언정 하이힐은 벗지 않겠다는 이도 있다. 아찔한 높이의 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는 모습. 섹시한 모습에 남성들도 싫지 않은 눈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여성들의 영원한 연인'이라고 일컬어지는 하이힐 양을 만났다.
◆유리벽 깨는 하이힐
각오가 남달랐다. 슈즈계의 불멸의 스타.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마음고생이 심했다. 웰빙 바람이 불면서 플랫슈즈(굽이 거의 없는 신발), 로버(굽높이 2, 3㎝ 정도의 구두) 등의 단화에 자리를 위협받았다. 그러나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올 들어서 다시 명예회복에 나서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제 인기가 이렇게 갑자기 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웰빙 바람이 불면서 하이힐이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몇 년 사이 '한물갔다'는 취급을 받았어요. 그러나 단화의 평범함에 식상한 여성분들이 저를 다시 찾기 시작했어요. 건강에 좋지 않다는 뉴스도 많았지만 저의 매력을 거부할 순 없었나봐요 "
'경기 불황에는 하이힐이 인기를 끈다'는 속설처럼 경기 불황의 장기화도 하이힐의 부활을 앞당기고 있다. 사람을 잡는다는 '킬힐'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재기에 성공한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순식간에 10㎝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 정말 멋진 일 아닌가요. 높은 굽만큼 자신감도 높아지죠. 무엇보다 저를 자주 신다 보면 종아리부터 엉덩이까지 근육이 수축돼서 예쁜 다리를 갖게 될 수 있어요. 못생긴 다리도 예뻐 보이게 하고 게다가 엉덩이와 가슴까지 '볼륨업'시켜주는데 저의 매력을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되는가 봐요. 호호호."
그러나 무조건 예뻐 보이려고만 하지 않는단다. "여성 대통령이 나오고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막는 '유리벽'이 존재해요. 저를 신고 또각또각 걷다 보면 그동안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졌던 당당함, 우월감을 찾을 수 있어요." 남성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익신장에 앞장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모든 여성에게도 평등해요. 나이가 들고 살이 찌면 전에 입던 옷은 못 입더라도 발 사이즈가 변하지 않는 한 늘 저를 이용할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도 남자들은 넘볼 수 없다는 것도 저의 매력이라 할 수 있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미니스커트보다 여성들에게 가까운 존재인 셈이죠."
◆맨홀 구멍에 빠지고 싶어
하이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 인터뷰 내내 활발했던 그녀의 모습이 살짝 어두워진다. 높은 굽 때문에 주인이 아파할 때면 마음이 아프단다. "제 주인 발에는 반창고가 떠날 날이 없어요. 발목과 종아리가 붓고 심지어 허리까지 통증을 호소할 때면 차마 못 보겠어요. 특히 주인이 엄지발가락이 한쪽으로 휘어지고 관절이 튀어나오는 무지외반증에 걸릴 때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인증하기 싫지만 자신 때문에 건강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죄인이 된 기분이다. 하이힐 때문에 하지정맥류 판정을 받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이따금 들려올 때마다 '뒤축'이 뻐근해진다. 어떤 날은 맨홀 구멍에라도 빠지고 싶다. 하지정맥류는 장시간 하이힐을 착용했을 때 장딴지 근육의 혈액펌프 기능이 떨어져 정맥 속 혈압이 증가하면서 다리에 정맥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질병이다. 몇 년 사이 하이힐과 함께 레깅스와 스키니진이 유행하면서 하지정맥류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마디병원 최창동 원장에 따르면 정맥류나 부종 혹은 불편한 의상으로 인해 혈류가 병목되는 현상은 다리에 쉽게 피로감을 주며 잦은 통증, 욱신거리며 쑤시는 증상 등을 동반한다고 한다. 오래 서서, 혹은 앉아서 일하는 직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으로 모두 정맥혈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이유다.
이 같은 각종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는 사람이 줄지 않고 있어 가슴이 아리다. 그래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도 쉽게 저를 포기할 수 없다면 다리 부기나 통증 등의 증상을 최대한 완화시키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앉아있는 동안만은 규칙적으로 발목 운동을 해주고 자기 전에는 다리를 심장보다 위로 들어 올려 다리에 고인 피를 심장으로 보내주는 것이 좋아요. 실천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고탄력 압박 스타킹을 착용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죠." 적당한 높이도 제시했다. "굽 높이는 자신의 키에서 100을 뺀 후 10으로 나눈 높이 정도가 적당해요. 예를 들어 160㎝의 여성은 6㎝의 힐이 적당한 거죠. 물론 횟수도 중요하죠. 저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일주일에 3번 정도만 신어 주시는 게 발 건강을 위해 좋아요. 많이 걸은 날은 족욕으로 발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도 좋고요."
◆남성들에게는 '공공의 연적'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도 맨홀만큼이나 두렵다. 하이힐을 미워하는 키 작은(?) 남자들이 꽤 있어 행동이 조심스럽다. 특히 최근 주인이 키 작은 남자를 사귀고 있어서 더욱 눈치가 보인다.
"안 그래도 요즘 신발장에만 있는 날이 많아지고 있어요. 주인이 저만 신고 가면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자꾸 싫은 티를 내잖아요. 여자가 좀 더 큰 게 뭐 어떤가요."
과거를 생각해보니 남자들의 이런 반응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먼 옛날 남성들을 위해 태어났지만 지금은 남자들로부터 '연적' 취급을 받고 있다.
"비록 지금은 남자들이 절 신을 수 없지만 저는 원래 남자를 위해 태어났어요. 저를 처음으로 유행시킨 사람이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잖아요. 그도 160㎝에 불과한 작은 키를 커 보이게 하려고 저를 신었지요. 이후 중세시대에는 귀족들 사이에 저를 서로 신겠다고 난리였지요."
최근에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자신을 찾는 남성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 것. "최근 남성들도 하이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남성들에게 패션의 한 아이템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요."
그녀의 목표는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대접받고 싶은 것이 꿈이다. 얼마 전 방송인 노홍철 씨가 10㎝가 넘는 남성용 하이힐을 신고 나와 프러포즈를 했을 때는 정말 행복했단다. "키높이 깔창으로 자신의 키를 속이는 것보다 당당하게 하이힐을 신을 수 있는 자신감이 더 남자다운 게 아닐까요. 시중에는 남성들도 신을 수 있는 하이힐들이 생각보다 많답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하이힐은?=출생연도와 태어난 곳이 정확지 않다. 다만, 기원전 4세기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테베고분 벽화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절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고대 그리스극의 아버지인 아이스킬로스가 무대 위의 배우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코르토르노스라는 통굽 구두를 신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진 것은 16세기쯤이다. 이 시대 베네치아 여인들이 거리의 오물을 피해 다니기 위해 신었다는 높은 굽의 '초핀'이 하이힐의 시작이었다. 초핀으로 시작된 하이힐을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시킨 것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태양왕' 루이 14세였다. 키가 작았던 그는 자신의 키가 커 보일 수 있도록 굽 높은 신발을 즐겨 신었고 귀족들이 따라하는 바람에 널리 퍼졌다. 이후 20세기 들어서 여성들의 굽은 점차 높아지고 가늘어진 반면 남성들의 굽은 낮아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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