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그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학교 수업 외에도 각종 학원에 다니느라 쉴 틈이 없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소식이 놀랍지도 않다. 아직 학교 문턱을 밟지 않은 유치원생도 예외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학습 부담을 느끼지 않은 채 유치원생들이 행복감을 맛보게 하고, 자연스레 인성 교육까지 시킬 수 있을까. 대구 남부교육지원청의 '행복 유아 그림책 프로젝트'도 그 같은 고민에서 탄생했다. 이 프로젝트 진행 배경과 현장 모습, 참가자들의 경험담을 들어봤다.
◆ '아이들이 밝게 웃어요', 그림책과 함께 떠나는 행복 여행
지난달 30일 오전 찾은 대구시 달서구 대천동 한샘초교병설유치원의 한별반 교실. 닭의 머리를 그린 마스크를 쓰고 일본 작가 우스기 미호가 쓴 그림책 '치킨 마스크'를 든 강사 오소저(44'여) 씨 주위로 28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았다. 오승희(39'여) 씨가 보조 강사로 옆을 지켰다.
이날 수업은 '그림책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행복 여행'. 그림책 선생님 역할을 맡게 된 오소저 씨 일행이 이곳을 찾은 것은 이날이 두 번째다. 수업 직전까지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오소저 씨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여기저기서 온갖 말들이 쏟아져 귀를 먹먹하게 했다.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그림책을 읽어 줄 수 있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한데 오소저 씨가 그림책을 들고 읽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업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오소저 씨는 낭랑한 목소리로 그림책을 읽어 나갔다. 오소저 씨가 요약해준 그림책 줄거리는 이렇다.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힘들어하던 치킨 마스크가 우연히 공부를 잘하게 해주는 올빼미 마스크, 힘을 세게 만들어주는 장수풍뎅이 마스크 등을 발견한 뒤 이 마스크들을 번갈아 쓰면서 신이 난다. 하지만, 곧 자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지 고민에 빠진다. 마침 꽃들이 자신들에게 물을 주던 치킨 마스크의 예쁜 마음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림책을 읽은 뒤 오소저 씨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킨 마스크는 어떻게 행복해졌을까요?" 아이들이 금세 여기저기서 외쳤다. "꽃들이 자기를 칭찬해줘서요." "자기가 잘하는 것이 별로 없어도 친구들이 함께 놀아줘서요."
오소저 씨가 다시 물었다.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아이들이 또 이야기를 쏟아냈다. "친구가 못 하는 게 있어도 따돌리면 안 돼요." "친구가 힘들면 도와줘야겠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까 싶던 아이들은 정확히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성북초교 위 클래스에서 상담 업무도 하고 있는 오소저 씨는 이 일이 아이들의 인성 교육에 보탬이 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함께 웃을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많은 것을 가르치겠다는 욕심 대신 편하게 아이들과 만나려고 합니다. 목은 아파도 순수한 아이들을 보며 웃을 일이 많아요. 주위에서 표정이 밝아졌다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제가 아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가는 셈이죠."
◆ '그림책에 대해 공부해요', 교사와 학부모 함께 동아리 활동
"숙제가 많아 힘들다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아이들이 웃을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죠."
'유치원에 있는 그림책 다소니'라는 동아리의 회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이 동아리는 지역 유치원 교사 24명이 모인 것으로 '다소니'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랑의 옛말인 다솜에서 딴 이름.
이 동아리는 지난 4월 만들어졌다. 대구 남부교육지원청에서 '행복 유아 그림책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교사 동아리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모인 교사들이 꾸려 나가고 있다. 이들은 월 2회씩 모임을 갖고 그림책에 대해 토론하고 외부 강사와 그림책 작가 등을 초청해 특강을 듣는 등 그림책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모임 회장은 16년 차인 유선혜 교사(월배초교병설유치원). 그는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책 속 장면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보게 된 것만 해도 큰 소득이라고 했다. "그림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어떤 것들을 알려줄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보게 됐죠. 작가나 아이들 눈높이 등 다양한 관점에서 그림책을 보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8년 차인 박은경 교사(장성초교병설유치원)와 4년 차인 장필경 교사(내당초교병설유치원)는 선배 교사들과의 만남 자체가 좋은 기회라고 했다. "경험이 많은 선생님들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림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만들기, 게임 등 다양한 독후 활동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좋고요."
15년째 유치원생들을 가르치는 이정연 교사(도원초교병설유치원)는 동시집 '꿈몽'을 펴내기도 한 작가다. "요즘 학부모들은 그림책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계세요. 교사인 제가 한발 뒤지면 안 되죠. 여러 나라의 동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이 모임의 장점입니다."
'학부모 행복 그림책 동아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32명의 학부모가 만든 모임. 회장 김영민(34'여) 씨는 유치원생 두 딸을 둔 어머니다. 그는 이 모임을 통해 그림책을 자꾸 학습과 연계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아이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엔 그림책을 읽어준 뒤 줄거리가 무엇인지, 등장인물이 누구누구인지 등을 꼬치꼬치 묻곤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젠 책 속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등에 대해 아이와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책에 더 관심을 많이 보입니다."
◆ '그림책으로 행복 맛보기', 남부교육지원청의 행복 유아 그림책 프로젝트
대구 남부교육지원청이 '행복 유아 그림책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3월부터다. 유아와 소통 경험이 있거나 열정을 갖고 있는 이들 가운데 18명을 선정한 뒤 10여 차례에 걸쳐 그림책 활용 교육에 대한 연수를 받도록 했다. 이들은 동화 구연, 노래와 율동뿐 아니라 수업 재료 만들기, 유아와 소통법 등을 익혔다. 연수를 마친 '그림책 선생님'들은 4월부터 12개 공립유치원과 20개 사립유치원을 방문해 각각 6차례씩 그림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남부교육지원청은 '그림책 선생님'을 지원받지 못한 유치원들을 위한 대안도 마련했다. 관할하는 모든 유치원에 3월 말 수업 매뉴얼인 '그림책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행복 여행'을 배포했다. 또 '그림책 선생님'들이 수업 후 '행복을 나르는 그림책 선생님'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http://cafe.edunavi.kr/bin/main/index.jsp?postCommID=boo)에 사진과 함께 수업 보고서를 올리도록 해 수업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림책 작가가 직접 유치원을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하반기에 참여를 원하는 유치원 가운데 '그림책 선생님'이 찾지 않았던 공립유치원 8개와 사립유치원 10개 등 모두 18개의 유치원을 따로 선정해 그림책 작가가 방문, 유아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마련한다. 10월에는 유아들이 만든 그림책을 모아 '남부 유아 그림책 박람회'도 열 계획이다.
남부교육지원청 김기식 교육장은 "어릴 때부터 인성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림책은 지식 습득뿐 아니라 바른 심성을 가꾸는 데도 중요한 도구"라며 "어린 아이들이 그림책 읽기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따뜻한 마음씨를 갖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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