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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활의 고향의 맛] 나무 병정 열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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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 숲 속에서 깊은 잠…산행 후 먹은 찰밥은 꿀맛

편백나무 숲 속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 저녁은 인근 고창 읍내 전통시장에서 사온 조개와 꼬막으로 조개 밥을 맛있게 지어 먹었다. 반주로 마신 소주 한 잔 탓인가. 저녁 9시 뉴스를 보다 이불은 덮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대로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깊이 잠이 든 건 좀처럼 없던 일이다. 몇 시에 자든 새벽 2시께엔 반드시 눈이 떨어져 마려운 볼일을 보고 나서야 다시 잠을 자는 것이 오랜 버릇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곯아떨어질 정도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무려 6, 7시간을 내리 잤으니 이상한 일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편백 숲이 뿜어낸 싸아!한 향기에 취했음이 분명하다.

이번 여행코스를 축령산 일대로 잡고 인터넷 서핑을 해보니 대충 이런 찬사들로 가득했다. '편백 숲에서 자고 나면 우선 몸이 개운하고 소변보다는 대변이 훨씬 더 잘 나와요. 아침에 일어나면 젊었을 적 불끈하며 경험했던 혈기도 느껴지고요, 장거리 산행을 해도 별로 피곤하지 않아요.' 그래서 축령산 일대를 샅샅이 살펴보고 피톤치드라는 물질이 혈액순환에 얼마만큼 도움을 주는지 그걸 직접 느끼고 싶었다.

여섯 도반들이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이곳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영화마을 민박집으로 달려왔다.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가지고 온 찰밥 세 덩어리와 한두 가지 반찬을 챙겨 산책을 겸한 숲길 산행에 나섰다. 산행에 재미를 붙이면 뒤돌아가는 법을 잊는다. 낯선 풍경 속으로 한 걸음씩 나아 갈 때마다 눈은 줌렌즈가 되어 새로운 풍경을 잡아당긴다. 재미있는 소설은 좀처럼 손에서 놓아지지 않듯 우리는 캘린더의 사진 같은 숲길로 마냥 걸어 들어갔다.

영화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걷다가 '하늘 숲길' 입구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섰더니 그곳 또한 별천지였다. 봄 하늘은 맑았고 아직 터트리지 못한 진달래 몽우리는 타는 가슴을 조여 맨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산 밑에서 산을 올려다보면 능선의 스카이라인밖에 보이지 않지만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조감 전망은 숲 속의 길과 집들이 낱낱이 훤하게 보인다. 먹이를 찾는 솔개가 하늘 높이 뜨는 이유를 비로소 알 만하다.

능선에서 모암통나무집 삼거리로 내려가는 어귀에 2층으로 된 팔각정에 올라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운동이나 노동을 한 후에 먹는 음식은 일종의 쾌락이다. 기나긴 생애 중에 다문다문 유쾌한 안락이 섞여 있으니 그래서 살맛이 나는 거다. 이 세상에 재미와 희망이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산행 중의 휴식과 식사, 산행을 끝낸 후의 취침은 비단 위에 수를 놓은 꽃처럼 그 자체가 행복이다.

모암통나무집이 있는 계곡은 숲이 울울창창하다. 마치 솜사탕 뭉치 같이 뭉글거리며 다가오는 편백의 향기를 추석 보름달을 입으로 베어 먹듯 그대로 한 입 물어본다. 코가 벌렁거리니 두 눈도 덩달아 시원하다. 고글을 벗은 상태로 눈보라를 맞는 것처럼 신선하고 차갑다.

아하!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피톤치드의 작용이구나. 침엽수 중에서도 100㎎당 함유량이 소나무 1.7 전나무 2.9 삼나무 3.6인데 비해 편백나무는 5.0에 가깝다. 지난밤 깊은 수면의 원인이 편백숲의 방향 물질을 홑이불로 덮고 잤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밤의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심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나 보네.

잠을 잃어버려 새벽부터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이 마을은 99세 이상 흡연지역입니다'란 팻말이 서 있었다. 밀알회에서 써 붙인 이 문구는 멋진 유머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표현이다. 마을 노인들조차 담배를 꼬나물고 고샅을 배회하진 않는다.

이 마을 산이네 민박집 앞에서 만난 중년의 입을 통해 동네 소식을 귀동냥했다. '암환자 대여섯 명이 월 70만원선에서 방 하나를 빌려 장기 체류 중이며 편백숲이 좋다는 소문이 번져 평당 50만원이던 땅값이 70만~80만원으로 올랐지만 팔 물건이 없다는 것. 영화마을은 편백보다는 오히려 물이 좋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등등.'

이튿날 축령산의 대덕, 추암, 모암, 금곡지구 등 4개 지역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중에서도 모암지구 통나무집으로 오르는 하늘 숲길이 힐링 코스로는 최적이었다. 쭉쭉 뻗은 높이 40m짜리 편백나무들이 열병식 하는 대열처럼 서 있었다. 나무 병정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거수경례로 예를 표했다. 나는 "쉬어"라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아무도 차렷 자세를 풀지 않았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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