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식물 종자를 개발하고 육성'보급하는 종자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일부 씨앗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쌀 정도로 고부가가치산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1월부터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세계 각국은 치열한 '종자 특허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나라가 향후 10년간 해외에 지불해야 할 종자 사용료는 무려 8천억원에 이른다는 게 정부 예측이다. 복숭아 신품종 개발 공로로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의 '신지식 농업인'에 선정된 이윤도(53) 경복육종농원 대표와 같은 민간 육종가들의 활약이 절실한 이유다.
◆'필'…'재수'…'촉'
이 대표는 올해로 19년째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 4만3천㎡(약 1만3천 평)의 과수원을 부인 김명숙(51) 씨와 일군다. 연간 소득도 2억원가량이나 된다. 하지만 이 대표가 주목받는 것은 단지 고소득 때문만은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금까지 10여 종의 우수 신품종을 개발'보급해 온 공이 더 크다.
5월 31일 찾은 경산시 남산면 갈지리의 경복육종농원은 거대한 '야외 실험실'이었다. 일반인이 봐서는 전혀 구분이 안 되지만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복숭아 품종은 50종이 넘는다. 경산 지역은 전국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하는 천도복숭아(Nectarine)가 대다수이지만 일부 털복숭아 품종(peach)도 있다. 조생'중생'만생종이 골고루 섞여 있어 출하 시기도 6월부터 9월까지 시차가 크다.
이 대표가 개발한 신품종 가운데 '특허권'이 보장되는 품종보호출원을 마친 것은 4종. 조생 암킹'올인'금봉'도희 등이다. 이 가운데 '올인'은 기존 암킹 복숭아의 대체 품종으로 과일이 굵고 맛이 좋다. 황도인 '금봉'은 당도가 높고 식미가 뛰어난 중생종이고, '도희'는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감유도' 품종이다. 쉽게 말해 겉은 천도복숭아이지만 붉은색을 띠는 과육은 털복숭아와 비슷하다. 천도복숭아는 유모종(有毛種) 복숭아에 비해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고, 당도가 낮으며 신맛이 많다.
"흔히 하는 말로 '필'(feel)이 꽂혀 육종에 재미를 붙였는데 경력 10년이 지나니 이제는 어느 종자와 어느 종자를 교배하면 내가 원하는 품종을 얻을지를 예상할 수 있는 '촉'이 생긴 듯합니다. 물론 재수가 좋아서 개발한 품종도 있었고요. '도희'는 수확한 뒤 너무 기뻐서 이름에 '기쁠 희'(喜) 자를 넣었습니다. 올해는 새로 개발한 금홍'백옥'금옥'올프레'천골드 등 천도복숭아 5종에 대해 품종보호 출원을 낼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상복도 터졌다.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국가에서 받은 셈이다. 4월에는 독창적 농업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인 공로로 '신지식 농업인' 20인에 선정됐다. 특히 과수 분야에서는 이 대표가 혼자 뽑혔다.
이어 11월에는 제17회 농업인의 날 행사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12월에는 국립종자원의 '대한민국 우수 품종상' 시상에서 '올인' 품종으로 농식품부 장관상을 차지했다. 이 상은 국내 육종 저변을 확대하고 국내 종자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2005년 제정됐다.
"이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은 넘어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인 만큼 죽기 전에 복숭아 품종 50개는 제 이름으로 등록하겠다는 각오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들 녀석도 제 뒤를 잇겠다며 대학에서 원예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있어 든든합니다. 허허허."
◆농가 소득 향상 위해 무상보급하기도
대표적인 여름 과일 가운데 하나인 복숭아는 경북이 주요 산지다. 2011년 기준으로 전국 복숭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영천'경산'청도 등 경북에서 생산된다. 특히 천도복숭아는 경산이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복숭아 재배 면적은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추진했던 과수원 폐원 사업에 따른 것이다. 경북의 경우 2002년 7천581㏊이던 복숭아 밭이 2010년에는 5천394㏊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복숭아 농가는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다. 경북의 경우 2011년 6천335㏊로 2005년 수준까지 회복됐다. 외국산 과일의 공세에도 복숭아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은 덕분이지만 이 대표와 같은 민간 육종가들의 품종 개량 노력도 든든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
"천도복숭아는 신맛이 많다 보니 시장이 작습니다. 하지만 제가 개발한 품종들은 천도복숭아와 털복숭아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어 복숭아 수요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난해에는 일본에서도 제가 만든 품종을 조사하러 오기도 했고요. 요즘 경산에서 생산되는 복숭아의 40% 정도가 제가 만든 품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복숭아 농가의 소득 향상은 경산 토박이인 그가 육종 분야에 뛰어든 계기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잠깐 대기업에 다녔던 이 대표는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 농촌진흥청 산하 일선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하던 중 귀농했다.
"원래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했습니다. 부모님도 농사를 지으셨고요. 그런데 정작 농업기술센터에서 과수 담당자로 일하다 보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재배 품종이 몇 가지 안 되니까 출하 시기가 겹치게 되고 소득도 늘지 않았지요. 차라리 내가 직접 뛰어들어서 해결해보자는 욕심에 농사를 짓게 됐고, 2001년부터는 신품종 개발까지 시작하게 됐습니다."
'농업인이 잘 사는 농촌을 만들어보자'는 그의 초심은 '복숭아 박사'로 이름을 떨치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했다. 신품종 보급은 물론 농가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전수를 위해 전국에서 강연활동을 벌이고 있고, 이웃 농민들과 힘을 합쳐 만든 복숭아영농조합의 판로 개척에도 앞장서고 있다.
2009년 경북도의 '농업 명장'에 선발되기도 했던 그는 현재 경북도 농업기술원의 명예연구관, 민간육종가협회 이사, (사)경산종묘클러스터사업단 이사로도 활약 중이다. (사)경산종묘클러스터사업단은 경산시와 대구가톨릭대, 경산과수종묘연합회가 참여한 산'학'연'관 협력체로 농식품부의 지난해 지역전략식품산업육성사업 추진실적 평가에서 전국 최우수사업단으로 선정된 바 있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는 복숭아 새 품종의 특허권을 수억원에 사겠다는 묘목업자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저야 목돈을 만질 좋은 기회였지만 우리 지역의 농민들은 앞으로 훨씬 더 비싼 값에 묘목을 사야 할 테니까요. 그동안 호남'충북 등 다른 지역 농가의 부탁으로 개발해서 무상보급한 품종도 여럿 됩니다." 이 대표는 지난해 '대한민국 우수 품종상' 상금 500만원도 과수산업 발전을 위해 기탁했다.
◆육종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 협약의 발효는 위기이자 기회다. 품종육성자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해외로 유출되는 로열티가 급증할 수도 있지만 뛰어난 국산 품종 개발을 통해 막대한 로열티를 벌어들일 가능성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취약한 종자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종자산업육성 중장기대책'을 수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종자 분야 연구개발에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집중투자, 종자 수출 2억달러 달성과 세계 5대 유전자원 강국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산'학'연'관의 역량을 결집시켜 경쟁력 있는 품목의 품종 개발을 이룬다는 '골든 시드(Golden Seed) 프로젝트'다.
국가자격증인 종자기사를 갖고 있는 이 대표 역시 종자산업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국내 종자산업의 경우 그 중요성에 비하여 시장 규모나 기술 수준이 낮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중국 산둥성에 선진기술 견학을 갔더니 저희보다 기술이 뒤처져 있더군요. 앞으로 우수한 품종을 많이 만들어 일본'중국'대만 등지에 복숭아 묘목을 수출하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신품종 연구를 위해 전 세계 주요 복숭아 생산지는 거의 다 가봤다는 이 대표는 매일 과수원 묘포장(苗圃場)에서 복숭아나무 하나하나의 성장 과정을 메모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외롭고도 힘든 일상이다. 하지만 그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농업은 여전히 대표적인 3D 직업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도전해볼 만한 직업입니다. 특히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육종은 소득 면에서도 꽤 전망이 밝습니다. 앞으로 우리 농업도 육종을 게을리하면 정말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만큼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합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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