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친정으로 간다면 퇴원하세요"

지금부터 36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산부인과 과장을 위시한 전문의, 전공의들이 아기를 낳은 산모들이 있는 산과 입원실 회진을 하고 있었다. 안색이 약간 창백해 보이는 한 산모 침대 앞에서 주치의인 2년차 전공의가 "이분은 약간의 미열이 있지만 오늘 퇴원시키겠습니다"라고 과장에게 보고했다.

잠시 후 병실 밖 복도로 나오자 곧바로 과장은 그 주치의에게 물었다. "저 산모분이 오늘 퇴원하면 어디로 가지요?" 주치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라니? 당연히 집으로 가겠죠'라는 표정으로 과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과장은 "저분이 퇴원해서 친정으로 가는지 시집으로 가는지를 묻는 겁니다"라고 했다. 주치의는 다시 당황했다. '친정으로 가는지, 시집으로 가는지 의사인 제가 알 수도 없고, 그걸 왜 알아야 되지요?'라는 표정이 주치의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그 당시에는 산후조리원이라는 시설이 없었다. 친정에 가면 친정 엄마에게,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에게 산후 구완을 받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이다. 1년차 전공의로 뒤편에 서 있던 나는 가슴이 쾅쾅 뛰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과장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는 아직 몸 상태가 덜 좋은 저 산모가 친정 엄마에게 산후 구완을 받으면 오늘 퇴원시켜도 되지만, 시어머니에게 산후 구완을 받는다면 하루나 이틀쯤 더 쉬게 해서 퇴원시키라는 뜻인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친정 엄마 앞이라면 늦잠을 자도, 몸이 쑤신다고 응석을 부려도, 미역국이 맛이 없다고 투정을 부려도 그저 다 받아 줄 것이다. 아무리 어질고 마음씨 좋은 시어머니라고 해도 그 앞에서 친정 엄마에게 하듯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좋은 의사와 그렇지 않은 의사의 차이는 의학적 지식, 기술이 아니라 환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 최고으 병원 중 하나인 하버드대 부속병원인 매사추세츠종합병원 현관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환자를 잘 치료하는 비밀은 환자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에 있다."

최첨단 의료기기와 수준 높은 의학적 지식을 갖춘 병원에서도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는 비밀은 다름 아닌 따뜻한 인간애,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의사, 마음이 따뜻한 의료가 차갑고 감정이 없는 현대 의료에 훨씬 우선한다는 진리는 우리가 감정과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인간인 이상 영원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따뜻한 손길에 의한 의료보다 첨단의료기기에 의한 의료가 우선시되고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의 이런 의료 상황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진다.

박경동 효성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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