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대구 중구 수동 삼성생명 주차장 옆. 어른 키 높이의 철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철판 안쪽에는 나무와 잡초로 가득한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철판 틈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들어갔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듯한 풀숲에는 각종 쓰레기, 담배꽁초가 나뒹굴고 있어 마치 '무덤가' 같았다.
이곳은 수년 전까지 10여 개의 사랑채와 안채, 별채, 곳간 그리고 우물이 있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던 연면적 990.2㎡ 규모의 멋스러운 한옥이 있던 자리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을 짓기 위해 한옥을 철거하면서 도둑고양이들의 안식처로 변했다. 폐허로 변한 한옥 터는 현재 2개 원룸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주민 신원용(63) 씨는 "사극에 나오는 부잣집 대감이 살 것 같은 집으로 동네 명물이었는데 이제는 모기만 들끓는 동네 흉물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대구의 한옥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고풍스러운 멋과 기품이 넘쳤던 한옥이 있던 자리는 회색 시멘트의 높은 건물이나 다가구 주택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도시'를 내세우는 대구시는 지역의 한옥 보존 대책은커녕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라지는 한옥
낡고 오래돼 관리가 어려운 한옥은 거주자에게는 처분하기 어려운 골칫거리라는 인식이 짙다. 반면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한옥은 높은 임대수익을 노리는 건설업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장소다. 이 때문에 상가가 밀집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위치한 한옥들이 건설업자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팔려 철거되고 있다.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이후 중구 지역에 한옥 8동이 사라지고 백화점 타워 주차장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200여 동만이 옛 대구 도심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대구 중구 남일동에 위치한 60여 년 된 한옥 형태의 한식당도 지난달 수억원에 팔려 4층 규모의 다가구 주택으로 신축 건축허가를 구청에 접수했다. 182동의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구 남구 이천동 역시 동네 일부가 지난 2006년 재건축지구로 지정되면서 한옥들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건축 경기 침체로 재건축 사업이 지연되고 있지만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윤형구 중구청 도시국장은 "한옥과 같은 관광자원이 사라지면 도심의 전통성이 사라지고 결국은 주변 상권이 쇠퇴하게 된다"며 "한옥의 보존 가치를 홍보하여 건축주를 설득할 방안과 옛 대구읍성 지역에 위치한 한옥에 대해 원룸 건축허가를 제한하는 등 무분별한 개발 규제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옥은 변신 중
한옥을 헐어버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한옥을 병원, 게스트하우스, 찻집 등 다각도로 활용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기와가 얹혀진 처마, 한여름 폭염에도 시원한 대청마루, 나무로 만든 문살 등 한옥만의 특색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임재양 외과'는 지난해 대구시건축상 일반 분야 금상을 받은 한옥 건물이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이 병원에서는 널찍한 대청마루에 앉아 진찰 순서를 기다리는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대구 중구 대봉동 청운맨션 맞은편 골목에 있는 카페 '모가'는 한옥을 개조해 꾸민 카페로 유명하다. 한옥의 예스러운 멋을 그대로 살린 이곳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그 자체로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외국인은 물론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한국인에게까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구 중구 동산동 신명고 앞에는 16년간 방치됐던 옛 구암서원이 한옥전통체험 공간으로 탈바꿈해 매달 평균 70여 명의 관광객이 머물고 간다. 옛 구암서원의 인기를 타고 오는 10월에는 중구 진골목에도 새로운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연다. 이곳에서는 숙박은 물론 민속놀이'다도'전통문화 등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옛 구암서원을 운영하는 (사)대구문화유산 허동정 대표는 "구암서원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도심 속에서 한국의 전통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칭찬을 한다"며 "대구시에서 한옥이 사라지는 것을 방치하지 말고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한옥을 대구시의 매력으로 활용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방치하는 대구시
'한옥의 쇠퇴'로 걸어가는 대구와 달리 서울시는 '한옥의 부활'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한옥 보존 방안을 담은 조례를 제정하는 등 도심 곳곳에 흩어진 한옥을 되살려 서울의 문화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대표적 제도가 '한옥등록제'로, 서울시는 2001년부터 한옥 유지'관리에 필요한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달 현재까지 540동이 한옥등록제를 통해 새 단장을 마쳤다. 급기야 서울시는 지난 2008년 한옥을 서울 미래 자산으로 육성하겠다는 '서울 한옥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오는 2018년까지 3천700억원을 들여 모두 4천500동의 한옥을 보존, 진흥할 계획이다.
서울시가 한옥으로 도심 경쟁력을 키우는 동안 대구시는 한옥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현재 대구시는 지역에 흩어진 한옥 현황 파악도 못 하고 있으며, 한옥을 보존'활용하려는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구시 관계자는 "서울시, 전주시와 같은 일부 지자체에서 한옥 관련 조례를 제정해 한옥 보존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대구시도 관련 조례를 마련하는 등 한옥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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