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루스 해협에 접한 실크로드의 종점 이스탄불에서 남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지중해와 만난다. 그곳에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번영했던 많은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존재한다. 당시에 활발했던 해양 실크로드와 육상 실크로드의 합류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지중해에서 홍해를 경유하여 인도양, 태평양으로 빠지는 항로 즉 '해양 실크로드'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육상 실크로드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치던 페르시아 왕조에 의해 저지됨으로 인해 해로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었다. 그러한 번영의 과실을 완전한 형태로 장악한 것이 기원전 1세기 전후 이 지역을 지배한 로마제국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유럽 쪽 피정복국가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실은 인도양을 거쳐 동쪽으로 더 나아가 중국 일대까지 통했던 것이다. 그 과실의 획득은 동로마 비잔틴제국을 거쳐 오스만제국까지 계속 연결되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심 거점으로 발전해 온 항구도시 에페소는 기원전 6세기 이전부터 해양무역의 중심지였다. 이집트, 그리스 상인은 물론 인도 상인들로 활기를 띠던 도시였다. 로마의 속주가 되었을 때는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에서 제일 중요한 무역항으로 인구가 25만 명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에페소 해안의 선착장에서 시작해 완만한 경사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아르카디아 거리이다. 폭 11m 길이 500m의 도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 옛날 그곳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밤에는 가로등도 밝혀져 상인들과 선원들로 붐볐다고 한다. 해양 실크로드의 기항지였으므로 배에서 육지로 진기한 물건들이 옮겨졌다. 이 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걸었다고도 한다. 도로 끝에는 거대한 원형극장이 연결된다.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지어졌다가 1세기 로마 네로 황제 시대에 증축되었다. 최대 수용인원 2만4천 명 규모로 연극과 문화예술 공연뿐 아니라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원형극장 맞은편에 화려한 셀수스 도서관이 당당하게 서 있다. 우아하면서도 균형 잡힌 이 석조 건축물은 에페소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찬란했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도서관은 서기 135년 로마의 아시아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4개의 정문 위에는 각각 여인의 석상이 있어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약 1만2천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둥 연결 부분의 장식이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을 절충하고 있는 등 에페소의 유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고대도시의 입구로 들어서니 수많은 대리석 조각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석재를 제외한 건축자재들은 모두 없어지고 오롯이 돌로 만든 도시의 골격만 남아 있는 것이다. 로마의 신전을 비롯한 각종 구조물들은 보통 돌덩이가 아니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월계관을 손에 든 니케의 여신상이 눈길을 끈다.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의 바로 그 여신이며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어원이기도 하다.
에페소는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비중이 큰 지역이라 교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성지순례의 땅이기도 하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남은 여생을 위해 에페소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집은 나중에 세월이 흘러 잊혔다. 그 후에 교황 방문에 의해 성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에페소의 고대도시는 방대한 부지의 유적 전체가 볼거리이므로 성지순례 교인들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몰려온 탐방객들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다. 특히 셀수스 도서관 앞은 사도 바울이 강론했던 장소로 유명해 더 많은 신도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서기 53년부터 사도 바울은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이곳에서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페소서'이다.
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했다.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서서히 바다를 메우면서 항구 도시의 기능을 잃어갔다. 15세기 오스만제국 시절 에페소는 쇠락하여 1천 년에 달하는 화려했던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 클레오파트라의 친동생 묘지가 발견되는 등 오늘날 이 도시에 대한 관심은 유물발굴 작업으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실크로드 3대 간선로인 오아시스로, 초원로, 해로 모두에 연결되어 있다. 향을 팔기 위해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에서 배를 타고 경주까지 오간 상인들의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 금성(경주)으로부터 로마까지 이어졌다는 근거가 되는 로만글라스 하나라도 더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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