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내가 살 테니 네가 죽어라'

아시아나 항공의 여객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 사고를 당한 뉴스가 연일 매체를 포화시키고 있다.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큰 사고인 만큼, 원인에 대한 조사와 그에 따르는 책임 소재에 관한 논란은 앞으로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목숨을 잃은 이들과 다친 이들에 대한 마음 아픈 보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기분 좋은 미담도 들을 수 있었는데, 바로 목숨을 걸고 대피 임무를 수행한 승무원들의 활약이었다. 이번 사고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 않고 비교적 적은 인명 피해만 낸 데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승무원들의 공이 크다. 승무원들이 생존 본능을 억눌러가면서 승객의 안전을 먼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훈련의 소산이기도 하였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이란 말을 들어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범죄나 사고에 희생되었다든지 하는 안타까운 뉘앙스의 표현으로는 종종 쓰이지만 숭고한 목적을 위해 제물을 바친다고 하는, 이 단어 본래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게 본다. 이 말이 오직 종교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던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크게 치르는 희생을 바람직하게 여겼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희생이라는 말을 좀처럼 제사와 연관하여 쓰지 않는 오늘날에는 희생이 가급적 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마지못해 희생을 하게 되더라도 되도록 조금만 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즉 불의에 희생을 당하는 사람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희생을 하려는 사람은 적다는 말이다.

신불(神佛)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초자연적인 가호를 확보하려는 행위는 요즘도 형태를 이리저리 바꾸어 성행하고 있지만, 주로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남을 잘 되게 하기 위해 내 것을 희생하는 것을 다들 겉으로는 칭찬한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은 소수의 영웅들이 할 일이고 나나 내 자식과는 되도록 연관이 없기를 바란다면 우리 사회에 희생의 가치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진심어린 교훈을 좀체 들어보지 못하니, 희생을 바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종교인들이 모범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 신문'방송에 요란하게 등장하는 거창한 희생보다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남을 배려하기 위해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줄 아는 모범 말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종교의 본업이 아니겠는가?

정태우 천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tinos56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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